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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만난 적이 있는 쌍용그룹의 김석원 전 회장도 화려한 경영인생을 펴다가 사라진 인사. 김 전 회장을 만난 것은 90년대 초반 무렵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0대 후반쯤이었다. 그 무렵 쌍용은 재계 서열 6위에 랭크될 만큼 잘나가고 있었다.
퇴계로와 충무로 사이에 있던 쌍용그룹 본사 빌딩은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을 상징할 만큼 유서깊은 빌딩이었다. 서울의 중심가에 쌍용은 그렇게 무게 있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 빌딩의 맨 꼭대기에 있던 김 전 회장의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활기있고 자신감 넘치는 그런 인상이었다. 샌님처럼 곱상한 얼굴과 엷은 미소가 인상적이었던 그는 아직 교정되지 않은 경상도 사투리가 말끝마다 배어났다.
회상해보면, 그는 쌍용그룹의 미래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었고, 경영 플랜도 장밋빛이었다. 건설경기가 초호황을 누리던 60년대와 70년대에 양회사업으로 돈방석에 올라앉은 것을 기반으로 통신, 금융 등으로 사업을 확대하겠다는 야심도 내비쳤다.
그의 야심찬 계획 중 하이라이트는 자동차 사업이었다. 사실 쌍용은 그룹 역사에서 가장 잘나가던 시기인 60년대 말에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김 전 회장의 부친인 김성곤 전 회장이 자동차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탓이다.
지금은 쌍용자동차로 알려진 이 회사는 원래 하동환자동차라는 이름의 회사였다. 하동환이라는 인물이 1962년 설립했는데, 대부분 부품을 일본, 미국 등지에서 들여와 조립자동차를 만들던 회사였다.
그러나 이 회사는 나중에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등이 등장하면서 경영난에 처했다. 경영이 어렵던 이 회사를 김성곤 전 회장이 인수해 쌍용자동차로 재출범시켰던 것이다. 그후 별로 주목을 못받던 이 회사는 80년대 들어 소득증대를 틈타 코란도와 무쏘라는 지프형 자동차를 선보이면서 일취월장했다. 김석원 전 회장은 무쏘신화에 크게 고무된 듯했다.
그러나 자동차사업은 간단한 분야가 아니었다. 막대한 투자와 마케팅, 그리고 국제전략이 필요한 사업분야였다. 쌍용의 역량으로 볼 때(그룹규모나 경영력) 자동차사업은 약간은 버거워 보였지만 김 전 회장은 이 사업에 목숨을 건 듯했다. 두 시간의 만남 동안 그는 한 시간이 넘도록 자동차 사업에 대한 자신의 꿈을 펼쳐보이는 데 할애했다.
김 전 회장이 자동차사업에 집착한 이면에는 자동차에 대한 그의 마니아에 가까운 관심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그는 자동차광이었다. 국내 재벌기업의 경영인 가운데는 자동차광이 적지 않다. 그 역시 자동차에 대해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말하면 김 전 회장은 (정확히 말하면 쌍용그룹은) 자동차사업이 그룹 몰락을 초래한 결정적인 단초였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무쏘와 코란도로 부상하던 쌍용자동차는 80년대 후반 현대정공이 비슷한 형태의 갤로퍼라는 모델을 내놓으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 쌍용보다 덩치가 더 큰 현대, 대우를 비롯해 전통 자동차기업인 기아의 공세가 펼쳐지면서 쌍용자동차의 입지는 급격히 위축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 전 회장은 90년 초반부터 해외로 눈을 돌려 벤츠와 기술제휴를 맺고 승용차시장을 두들기기로 했다. 이것이 결정타였다. 막대한 투자비와 고정비를 감당하기 위해 그는 그룹의 전 재산을 은행에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렸다. 이때 동원된 담보 중 대표적인 것이 용평리조트였다.
문제는 그런 희생을 치르면서 전개한 자동차사업이 국내외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상황이 더 나빠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시동이 걸린 자동차사업은 중단이 불가능했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더 많은 투자가 필요했다. 신모델을 개발해야 했고, 라인을 새로 깔아야 했다. 그때마다 투자비는 최소 2천억원이 넘었다. 이미 쌍용은 90년대 중반 무렵 그룹 대부분의 자산이 은행 담보로 들어가 있을 정도였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그룹 내부에서는 자동차사업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셌다. 일부 경영인들은 그룹 전체가 위험하다며 김 전 회장에게 자동차사업에서 철수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김 전 회장을 옹호하는 왕당파들에 의해 차단당했다.
당시 자동차 철수를 주장하다 그룹에서 물러난 한 임원의 얘기. “94년 무렵 자동차 사업이 그룹 전체를 위기에 빠트릴 것이라는 견해를 상당수 경영인들이 주장했다. 그러나 일부 김 전 회장의 측근들이 이를 가로막았다. 결국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말았다.”
김 전 회장은 95년 무렵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른 뒤였다. 이미 때는 늦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동차사업을 접기로 하고 회사를 다른 기업에 넘기는 방안을 짰다. 때마침 삼성그룹이 자동차사업에 진출하려는 것을 알고 그는 이건희 회장에게 회사를 인수하도록 물밑작업을 벌였다. 당시 삼성도 쌍용자동차의 인수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 협상은 결렬됐다. 김 전 회장은 삼성과 협상하면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도 몰래 매각협상을 벌였던 것이다. 한푼이라도 더 받아보자는 김 전 회장의 전략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이건희 회장은 김석원 전 회장의 이중플레이에 크게 분노했고, 매각협상을 중단해버렸다. 김우중 전 회장은 처음에는 높은 값을 쳐주려다가 삼성이 인수를 포기하자 인수가격을 후려쳤다. 결과적으로 김 전 회장은 자신의 이중플레이로 제값조차 못받을 처지가 됐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김 전 회장은 대우에 매각하는 방안마저 무효화하기에 이르렀다.
김 전 회장이 쌍용차 매각을 두고 왔다갔다 하는 동안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자에 이자가 더해지면서 부채는 천문학적인 규모로 늘어난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96년부터 국제수지가 악화되면서 금리가 폭등해 쌍용의 부담은 기하급수로 증가됐다.
결국 다급해진 것은 쌍용차에 수조원의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었다. 채권단은 김 전 회장을 압박했다. 매각을 하든지 그룹의 자산의 팔아 돈을 갚으라고 재촉했다. 이미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됐음을 감지한 김 전 회장은 채권단에 쌍용차 처리문제를 떠넘겼다.
이에 따라 채권단은 삼성과 대우에 매각협상을 재개했지만, 이미 삼성은 여론에 밀려 자동차사업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쌍용차를 인수할 곳은 대우밖에 없었다.
김우중 전 회장은 쌍용차 채권단의 인수제안을 두고 머리를 굴렸다. 사실 쌍용차를 인수해보았자 대우로선 큰 이득이 없었다. 그렇지만 쌍용차 인수를 통해 또다른 금융특혜를 받는다면 얘기는 달랐다. 김우중 전 회장은 채권단에 쌍용차 인수의 조건으로 막대한 추가지원을 요구했고, 채권단도 이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김석원 전 회장은 자동차를 팔고 단돈 1원도 못건졌다. 더욱이 그는 자동차사업 실패로 담보에 들어간 그룹 전체를 날리고 마는 전대미문의 경영실패를 경험하고 만 것이었다.
정선섭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