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
지난 11월 23일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을 가하자 재정부는 곧바로 24시간 비상상황 대응체계를 가동해 신용부도스와프(CDS), 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등 국제 금융시장에서의 한국 지표 동향과 신용평가사, 외국인 투자자의 움직임 점검에 들어갔다. 이러한 발 빠른 대응에도 불구하고 재정부가 판을 짜왔던 경제정책들은 곳곳에서 어그러지고 있다.
지난 11월 12일 서울에서 막을 내린 G20 정상회의에서 한국 정부가 얻은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는 외국인 투자 자금 중 유동성이 높은 핫머니에 대한 규제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은 것이었다. 최근 미국 등 선진국들이 자국의 통화 가치를 낮추기 위해 유동성을 높이면서 이 넘쳐나는 자금이 아시아 신흥국으로 몰려들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외국 자본 대거 유출로 피해를 봤던 정부 입장에서는 언제 갑작스레 떠날지 모를 자금이 대거 들어오는 것이 반갑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정상회의 의장국을 맡은 데다 급할 때는 외국 자금을 찾고 위기가 가시니 외국자금을 내친다는 비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금융위기가 불거지고 외국인 자금이 유출되자 채권투자 이자에 대한 세금을 면제하는 등 외국인 자금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적이 있다. 다행히 서울 정상회의에서 자본이동 규제 필요성에 합의가 이뤄지면서 외국인 자금 유출입에 대한 대책 마련을 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외국인 채권투자에 대한 이자소득세를 부활시키기로 하는 등 외국인 자금 규제에 나섰다.
하지만 연평도 포격으로 한국의 지정학적 위험도가 높아지면서 외국인 자금을 잡아두기 위한 정책 마련이 다시 시급해졌다. 골드만삭스나 노무라 증권 등 해외 투자은행들도 외국인 자금 규제 정책 연기를 조언하고 있어 재정부 관료들의 고심을 깊게 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7% 경제성장률, 국민소득 4만 달러, 7대 경제대국을 이르는 ‘747 정책’의 미련을 벗지 못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던 ‘2011~2014년 연평균 경제성장률 5%’주장도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정부가 내년도 경제성장률을 5% 내외로 발표했을 당시부터 현실성이 없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정부는 최근 금융위기로 잠재성장률에 못 미치는 성장을 해온 만큼 달성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하면서 정부는 ‘5%’에 더 이상 매달리는 분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연평도 포격 사건을 기회로 ‘5% 성장론’의 출구전략으로 활용하려는 느낌마저 주고 있다.
윤종원 재정부 경제정책국장은 11월 29일 윤증현 재정부 장관과 국책·민간 연구기관장 간담회 결과를 설명하면서 “민간과 국책 연구기관이 내년 성장률을 4% 정도로 보고 있다. 정부는 내년 성장률을 5% 내외로 가져갈 수 있을 것으로 보지만 대외 여건이 악화될 경우 다소 낮아질 가능성도 있다”면서 “다음달 14일 경제운용방향에서 내년 성장률 전망을 내놓겠다”고 말해 내년 성장률 전망이 낮아질 수 있음을 내비쳤다.
이날 연구기관장 간담회에는 한국개발연구원(KDI)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한국조세연구원 금융연구원 노동연구원 삼성경제연구소 LG경제연구원 현대경제연구원 SK경영경제연구원 등 국책 및 민간연구기관 원장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국책 연구기관들은 내년 성장률을 4%대로, 민간연구소는 4%내외로 제시했다. 심지어 삼성경제연구소는 3.8%를 제시했다.
이런 상황에 10월 산업생산동향이 발표되자 재정부는 더욱 당혹감 속에 빠진 상태다. 경기 선행지수와 동행지수가 3개월 연속 동반 하락한 데다 제조업 생산은 22개월 만에 가장 큰 폭의 하락을 보이며 성장률 5%론에 찬물을 끼얹은 때문이다. 재정부 관계자는 “미국이 경제 불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유럽이 다시 재정위기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에서 연평도 포격까지 겹치면서 국내외 불확실성이 너무 커졌다”면서 “경제는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5% 경제성장률 전망은 빈말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연평도 포격 사건의 여파를 줄이기 위한 국제 신용평가사들에 대한 작업도 겉으로 보기에는 성과를 얻었지만 불신을 완전 해소하지는 못했다. 재정부는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무디스와 피치, 스탠더드 앤 푸어스(S&P) 3대 국제 신용평가사를 상대로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 유지를 위한 작업을 펼쳤다.
그 덕분에 S&P는 “이번 사건이 한국에 대한 투자나 신용측정 지표를 훼손시키지 않을 것이며 현 신용등급에는 연평도 포격과 같은 북한의 공격 위험이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피치와 무디스도 한국의 신용등급에 변화를 주지 않고 있다. 현재 S&P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 피치는 A+, 무디스는 A1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으로 유지 중이다. 하지만 무디스는 △북한의 최근 도발이 (과거보다) 근본적으로 더 무분별한 행동인지 판단 중 △한반도 긴장 고조는 한국의 신용등급 평가에서 이벤트 리스크를 높일 수 있다고 밝히는 등 연평도 이후 흐름을 지켜보는 분위기다.
재정부는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이 지난 후에야 전시 물자 비축과 인력 활용에 필요한 비상대비자원법 시행규칙을 변경하고 나서는 등 뒷북 대응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재정부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2월 기획예산처와 재정경제부를 통합하면서 기획재정부로 명칭을 바꿨다. 하지만 전시 자원관리를 위한 법규는 ‘재정경제부 소관 비상대비자원관리법 시행규칙’으로 남아 있었다.
비상대비자원관리법은 전시 등 비상사태 때 인력과 물자 등 자원을 활용하기 위한 계획 수립과 훈련 등을 규정한 법률로 부처별로 이에 대한 시행규칙을 두고 있다. 재정부는 명칭이 재경부에서 재정부로 바뀌었지만 시행규칙의 명칭을 2년이 넘도록 바꾸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소관 시행규칙이 없으면 법률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음에도 제대로 정비를 못하고 있었다가 북한의 공격이 있자 부랴부랴 고친 셈이다.
김서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