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주간지 <다이아몬드>에 게재된 신격호 회장의 최근 모습. | ||
최근 발간된 일본의 시사주간지 <다이아몬드>는 롯데그룹의 창업주이자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신격호 회장(일본명:시게미쓰 다케오)과의 인터뷰 및 취재를 통해 롯데 창업 56년에 얽힌 비화를 게재했다.
다음은 이 주간지에 실린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종전 직후에 롯데를 창업하여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거대재벌을 키운 남자 - 언론에 거의 등장한 적이 없는 그룹 총수인 시게미쓰 다케오(신격호)가 여든한 살이 되어 자신의 체험과 경영철학을 적나라하게 밝혔다.
롯데 창업 56년은 그야말로 파란만장이라는 표현 그대로였다. 그가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은 전후에 점령군들이 껌을 씹고 있는 것을 보고 돈벌이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사업에 뛰어든 것이 계기였다. 껌은 간단하게 만들 수 있을 뿐더러 별다른 설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당시는 설탕을 배급받던 시기여서 아이들은 단 것에 굶주려 있었다.
물론 간단히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경쟁도 치열했다. 도쿄에만 1백50~1백60사가 있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초콜릿으로 눈을 돌렸다. 초콜릿은 과자업계에서는 가장 매출이 많아서 이것을 하지 않는 한 중소기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초콜릿 사업에는 메이지(明治製菓), 모리나가(森永製菓)라는 양대 산맥이 있었다. ‘달걀로 바위치기’라며 은행은 물론이고, 사내에서도 반대가 있었다. 설비투자에 16억엔 정도 들었지만 은행은 도와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상사(商社)에 부탁해서 간신히 조업할 수 있었다. 만일 초콜릿 사업이 실패한다고 해도 껌으로 올린 수익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은 서 있었다.
신 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1941년. 18세라는 젊은 나이였다. 종전 후인 47년에 츄잉껌 제조를 시작하여 다음 해인 48년에 현재의 롯데를 창업했다. 껌 업계에서 최고였던 해리스를 제치고 64년에는 그토록 바라던 초콜릿 시장에 뛰어 들었다. 그 후 메이지, 모리나가를 추격하여 84년에는 드디어 일본 국내 과자업계의 선두로 나섰다. 58년에는 친동생이 한국 롯데제과를 설립, 일본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한국에 쏟아부어 유통과 엔터테인먼트를 기둥으로 하는 거대재벌의 태동이 시작된다.
한국에서 처음에는 식품회사가 아니라 중화학공업을 하고 싶었다. 일본의 공업화를 지켜보고 한국에서도 같은 순서로 진행될 거라 생각했고, 과자는 장래성이 없었다. 과자로는 선두기업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석유화학산업 참여를 검토했으나 한국정부가 지금의 LG를 지정하는 바람에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정부가 제안한 것이 “제철을 하지 않겠나”는 것이었다. 제철사업에 관한 것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고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알아보니 막대한 설비자금이 필요했다. 당시 하치만(八幡)제철에 상담을 하러 가자 “음, 개인이 하기엔 무리가 아닐까요”란 말을 들었다.
하지만 정부의 요청도 있어서 1년 동안 일본의 제철공장을 전부 보러 다녔다. 미국이나 유럽에도 갔다. 그 결과 연산 1백만톤 규모의 설비라면 충분히 경쟁력도 있고, 은행의 융자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 정부가 “제철은 국가에서 하기로 했으니 이제 됐다”고 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정부에서 제안한 것이 호텔사업이었다. 정부의 관광공사가 경영하는 ‘반도호텔’이란 것이 있었는데, 제대로 일을 못해서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든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호텔도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제철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세계 일류 호텔에 전부 묵어 보았다. 호텔사업이란 어려운 것이다. 일본도 그렇지만 세계를 둘러보아도 호텔 단위로 이익을 내는 곳은 상당히 적다. 단 한국이라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전쟁으로 서울 시내는 폐허 상태라 일류호텔 같은 건 없었다.
신 회장의 경우 부탁을 받아서 시작한 사업이 많다. 한국의 다른 재벌들은 돈을 빌려 사업을 키워나갔지만 그는 ‘소심’했다. 호텔사업은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의 직접적인 요청이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신 회장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마음에 들었던 일본 제국호텔 본관의 외벽과 같은 인도산 사암을 구하기 위해 사원을 인도로 파견해서 코스트를 10분의 1로 줄였다.
▲ 롯데백화점 | ||
신 회장은 아직 일본에 귀화한 상태가 아니다. 한국 국적 그대로인 것. 한일 양국에서 적절히 다른 모습을 보임으로써 한국에서의 사업 다각화에 매진했다. 호텔 다음은 백화점 업계 진출. 그리고 89년에는 도쿄 디즈니랜드에 대항이라도 하듯이 롯데월드 개장에 나선다.
유원지를 중심으로 호텔이나 백화점, 쇼핑몰이 있는 시설이 있다면 사람들이 오지 않을까. 아이들과 놀러올 수도 있고 주부들도 쇼핑할 수 있다. 주차장도 충분히 만들어서 모든 것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으면 편리하지 않은가. 하지만 롯데월드의 구상을 이야기하자 다시 사내에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런 곳에 성인 남자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캐나다의 에드먼턴이란 곳에 그가 생각한 것과 같은 상업시설이 오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추운 겨울날 신 회장은 직접 그 곳으로 갔다. 에드먼턴은 인구 40만 정도의 도시인데, 일요일에는 호텔이나 쇼핑 몰에 10만 명이 몰렸다. 영화관이나 유원지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신 회장은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롯데월드 주변에 4만 평 정도의 부지를 샀다. 총투자액은 3만달러 정도. 당시로서는 큰 투자였지만 어중간한 규모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다. 만일 실패한다고 해도 일본에서 벌어들인 이익으로 충분히 메울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서울올림픽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서 우선 호텔을 짓고, 그 다음해에 유원지를 오픈했다. 그 후 롯데월드에 있는 모든 시설의 내장객 합계를 보면 많은 날에는 30만 명 이상 온 날도 있다. 예상을 뛰어넘는 숫자였다.
어쨌든 롯데월드의 대성공으로 한국 롯데는 90년대에 황금기를 맞이한다. 호텔, 백화점, 유원지 등의 매출 총액은 2조엔을 돌파. 지금은 일본 롯데 매출 규모의 일곱 배 가까이 늘어나, 효자회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사업욕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현재 롯데월드 옆에 제2의 롯데월드 건설을 검토중이다. 더구나 도쿄의 가사이에도 롯데월드 도쿄를 구상하고 있다. 일본을 발판으로 삼아 한국 6위의 재벌그룹을 키운 신 회장의 시선은 중국, 인도, 러시아까지 미치고 있다.
롯데그룹의 급성장 배경에는 철저하게 계산된 ‘방정식’이 존재한다. 한국 롯데의 강점을 새로이 검증하여 일본과 한국 기업의 얼굴을 때와 상황에 맞게 교묘하게 달리한 사업 확대 수법의 비밀에 접근했다.
1997년 12월3일, 국제통화기금(IMF)는 한국 정부에 대해 2백10억달러의 자금지원을 결정한다. 2001년 8월까지 IMF 체제하에서 한국은 구조개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 정치적 연줄과 논리에 안주했던 현대나 대우와 같은 거대 재벌조차 해체의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아시아 위기의 폭풍에도 꿈쩍하지 않는 재벌도 있었다. 바로 당시 한국 재벌 10위였던 롯데. 아시아 위기 후 한국정부는 각 기업에 일률적으로 부채비율을 2백% 이하로 내릴 것을 요구했다. 2004년의 랭킹에서는 많은 재벌이 경영파탄, 혹은 정리로 소멸한 경우가 많아 97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와중에도 롯데는 10위에서 6위로 오르며 부채비율도 2백17%에서 67%로 개선됐다. 삼성 수준의 재무상태다.
롯데는 현재 한국에서만 2조엔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본가’인 일본 롯데의 일곱 배에 달하는 그룹을, 실질적으로 보면 4반세기 만에 쌓아올린 것이니 놀라울 뿐이다. 일본에서는 식품, 음식 부문이 압도적인 주력사업이지만, 한국에서는 약 2조엔의 매출 중 식품 부문은 겨우 18%에 지나지 않는다. 매출의 대부분은 롯데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유통 부문, 롯데호텔이나 롯데월드와 같은 관광 레저 부문, 그리고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공업 부문이다. 덧붙이자면 슈퍼마켓을 포함한 유통 부문이나 식품 부문, 호텔의 연간 생산량은 국내 최고다.
한국의 세븐일레븐 운영은 롯데가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공업 부문에서는 캐논이나 후지필름과의 합병회사와 알루미늄 제련 자회사까지 있다. 석유화학이나 건설 자회사의 매출은 1천억엔대를 넘는다.
한국에서의 사업은 58년 신 회장의 친동생이 설립한 제과회사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 후 친동생과의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고, 65년의 한일 국교정상화, 다음해인 66년의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 협정체결을 계기로 한국의 롯데는 신 회장의 단독기업으로 재출발한다. 전환을 맞이한 것은 79년이다. 이 해에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적인 의뢰로 서울시 중심부의 소공동에 롯데 호텔을 오픈. 계속하여 백화점과 호텔 신관 등을 건설하여 이 일대를 ‘롯데 타운’으로 개발해 간다.
▲ 신격호 회장을 취재보도한 <다이아몬드> 지면. | ||
신 회장의 측근은 “롯데에게 일본은 옷의 오른쪽 주머니, 한국은 왼쪽 주머니와 같다”고 말한다. 오른쪽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이 줄어들어도 왼쪽 주머니로 옮겨진 것뿐이기 때문에 그 옷을 입고 있는 신 회장으로서는 아무 영향이 없는 것이다. 이 양쪽 주머니를 연결하는 존재가 한국의 ‘호텔 롯데’다. 한국의 그룹 기업 중에서 호텔 롯데만이 100% 일본 자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 롯데의 자금력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롯데호텔은 서울과 부산, 롯데월드 건설로 5억달러의 차입이 있지만, 그 반 이상은 UFJ은행(구 산와은행)과 미즈호은행(구 다이이치칸교은행)에서 조달했다. 나머지도 전부 일본 은행에서 빌렸다. 당시 일본 은행의 대출금리는 4~8%.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18~19%(시장금리)로 고금리였다. 일본에서 조달하는 것이 지불이자를 낮게 유지할 수 있다. 더구나 일본에서 빌린 1억엔은 한국에서는 그 몇 배의 가치가 있다. 보통 한국기업은 상대가 안 된다.
한국에서는 ‘외국기업’으로서의 특권도 이용할 수 있다. 66년 한국은 외자도입법을 제정하여 풍부한 기술력, 자금력, 판매력을 가진 외국기업 유치에 나섰다. 이 법률을 이용하면 건설관련 자재의 관세나 이익에 관계되는 지방세, 소득세가 일정기간 면제된다. 롯데는 호텔 건설 때 이 외자도입법에 따른 면세 혜택을 모두 누렸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100~300%나 드는 건설자재의 수입관세가 제로가 됐다고 한다.
일본기업과 한국기업으로서 각각 다른 얼굴을 사용하는 절묘한 방법으로 롯데를 한국 6위의 재벌로 끌어올린 신 회장의 나이는 여든이 넘었다. 철저하게 외부와의 접촉을 피해왔다. 검은 링컨컨티넨탈을 타고 오전 10시에 회사에 나와 비서도 없이 눈에 띄지 않게 안내 데스크를 지나친다. 홀에 서있는 방문객 중에 이 노인이 총자산 3조엔 롯데그룹의 총수라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적다.
짝수 달은 일본, 홀수 달은 한국에서 일한다는 그의 사령탑은 롯데호텔 신관 34층의 스위트룸. 한국에서는 여기에 틀어박혀서 부하들에게 차례로 지시를 내린다.
98년 롯데는 한국에서 종합 슈퍼마켓 업계에도 본격적으로 참가하여 6년 동안 32개 점포를 집중적으로 냈다. 까르푸 같은 외국자본과의 과열된 경쟁을 뚫고 순식간에 업계 2위에 올랐다. 한일의 ‘시차’를 이용한 폭발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두 개의 국적을 가진 이색 재벌의 팽창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신격호 회장의 활동은 영원할 수 없다. 올해 5월 롯데는 집행임원제를 도입했다. 새로 집행임원이 된 8명 중 3명은 차기 사장으로 주목받는 신동주(시게미쓰 히로유키)의 참모라는 말이 있다. 업계의 억측을 부른 것도 당연했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롯데 그룹을 통솔해 온 신 회장도 이제 여든하나. 인터뷰에서 신 회장은 “(도쿄 롯데월드 구성은) 어떻게든 생전에 실현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과자로 고수익을 올리는 모델을 구축해, 일본에서 축적한 이익을 한국에 투자함으로써 두 나라에 걸친 거대 기업을 일구었다. 카리스마적인 경영철학, 선견지명을 갖춘 그가 없었다면 롯데의 급성장은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포스트 신격호 체제에 대한 불안감이 지금 롯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롯데는 급성장의 대가로 신 회장이 없으면 그룹 전체를 통제하기 어렵다는 골치 아픈 문제를 안게 됐다. 총자산 3조엔이라는 거대재벌의 흥망성쇠는 그룹 통솔체제의 확립에 달려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