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예산안 파동’ 관련 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가 지난 15일 오후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개혁성향 초선의원 모임 ‘민본21’과 회동, 김성태 간사 등 초선 의원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
한나라당의 예산안 날치기 후유증이 깊어지고 있다. 청와대는 소수야당에 대한 비타협 강공 전략과 ‘형님’ 예산 편중 논란 등으로 민심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에 대해 상당히 곤혹스러운 모습이다. 그럼에도 예산안을 법정기한 내 확정했다는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며 날치기 정국 탈출에 부심하고 있다. 하지만 당내 소장파의 ‘반란’으로 향후 국정운영에 상당한 부담을 떠안을 전망이다.
지난 16일 소장파 22인은 ‘물리력을 동원한 의사진행 불참’을 선언, 2년이나 남은 이명박 정권의 대야 전략을 상당히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다. 특히 남경필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의 한미 FTA 비준안 타협 처리에 대한 ‘마이 웨이’ 선언은 정부의 국정운영 로드맵을 송두리째 뒤흔들 핵폭탄이다. 정치권에서는 “소장파의 FTA 비협조 정국이 이 대통령의 의회 장악력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려 레임덕의 문턱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날치기 정국 후폭풍의 중심에 선 소장파의 대반란 막후를 짚어봤다.
12·8예산안 날치기는 여권에 심각한 생채기를 남겼다. 예산안을 ‘겁없이’ 통과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뒤 보여준 여권 지도부의 수습 전략 부재는 당·정·청의 총체적 난국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진단이다. 특히 주류의 일방적인 국정 운영은 그동안 잠복해 있던 계파 간 갈등을 또 다시 폭발시키고 있다. 소장파는 ‘비폭력 국회 만들기 자정운동’과 ‘FTA 비준안 타협 처리’라는 투 트랙으로 주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런 소장파의 반란으로 앞으로 주류가 코뚜레를 꿰고 일방적으로 소몰이를 하던 식의 국정운영은 사실상 막을 내릴 가능성이 커졌다.
먼저 날치기에 대한 반성으로 소장파 의원 22명은 ‘의미 있는’ 선언을 했다. 구상찬 김성식 김세연 홍정욱 김성태 황영철 정태근 의원 등 계파를 초월한 초선들은 앞으로 “물리력에 의한 의사 진행엔 불참하겠다”라고 선언했다. 지난 8일 새해 ‘예산안·쟁점법안 강행처리’에 대한 반성과 재발 방지를 위해 앞으로는 절대 ‘각개전투’에 동원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들은 또한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19대 총선에도 출마하지 않겠다”고도 약속했다. 만약 이들이 약속을 실천할 경우 여권의 일방적 국정 운영에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나라당 의원은 171명인데 22명이 이탈하면 149명으로, 국회 본회의 표결시 원내 과반(149명) 확보가 불투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의 ‘독자행보’에 대한 여당 내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예산안 날치기 과정에서 ‘행동대원’으로 앞장섰던 사람들이 뒤늦게 자성 운운하는 것에 대해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혹평도 쏟아진다. 여당 일각에서는 “과거에도 무슨 일만 터지면 모여서 성명 내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행동에 나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라는 반응도 나온다. 특히 22인의 ‘사무라이’들이 ‘주군’ 이명박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책임문제는 일절 거론하지 않은 것에 대해 “스스로를 계파정치에 묶어두는 자가당착의 전형”이라는 지적도 있다.
정부 주도의 중요 법안도 22인의 협조 없이는 처리가 불가능하다. 특히 한미 FTA 비준안 처리를 앞두고 있는 여당으로서는 이들의 비협조 행보가 눈엣가시로 다가올 것이다. 앞서 김성식 의원도 이에 대해 “불출마 선언 과정에서 FTA 처리 문제를 논의한 것은 아니지만 (강행처리 비협조) 그 원칙에 따라 가는 것으로 해석하면 된다. 앞으로 밀어붙이기는 절대 없을 것이다. FTA 비준안도 강행처리할 것이라면 꿈 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장파의 반란은 22인의 강행처리 비협조 선언에 이어 남경필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의 ‘FTA 비준안 처리 물리력 동원 불가’ 천명으로 그 정점에 이르고 있다. 사실 이런 선언은 남 위원장에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는 위험한 길임에 틀림없다. 집권여당의 상임위 위원장으로서 현 정권 최대의 핵심 국정과제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중대한 ‘모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 위원장의 결의는 확고하다. 남 위원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여야가 합의하지 않을 경우, 비준동의안을 (상임위에) 상정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남 위원장은 한나라당 의원 22명이 발표한 “의원직을 걸고 물리력에 의한 의사진행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에도 최다선(4선)으로서 동참했다. 또한 그는 “성명에 참여한 22명이 빠지면 외통위 본회의의 의결정족수가 안 된다. 우리가 안하겠다고 하는데 지도부가 밀어붙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비준안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상정권한을 가진 남 위원장이 FTA 여야 합의 처리 입장을 고수할 경우 FTA 국회 처리는 사실상 어려워진다.
이에 대해 여권 주류는 국정 로드맵이 한없이 표류할 것을 우려하며 남 위원장의 ‘마이웨이’ 선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특히 ‘리베로’ 이재오 특임장관은 FTA도 예산안과 같이 하루빨리 처리해야 하는데 늦어지고 있다며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이에 대해 “남 위원장이 이 장관을 만난 것으로 안다. 이 장관이 ‘(예산이고 FTA고 간에) 다 빨리빨리 해치우자’고 주장했다고 들었다. 이에 남 위원장이 FTA 처리를 서두르면 안 되는 이유를 5~6가지 들이대며 반박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장관은 머리를 숙이고 딴청을 피워 이를 보던 남 위원장도 답답해했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소장파의 또 다른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 장관에게 진짜 문제가 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지, 알아도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건지, 하여간 노회하게 대처하며 우리의 공격을 피해가기만 할 뿐 도무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아 너무 답답하다”라고 말했다.
남 위원장은 여권 주류의 FTA 신속 처리 움직임에 일단 제동을 걸며 지구전으로 끌고 갈 계획이다. 하지만 한미 FTA가 현 정부의 후반기 최대 국정과제라는 점을 감안하면 청와대와 당 지도부의 거센 공격이 예상돼 남 위원장이 4선의 중진으로서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가기에는 부담이 있다. 또한 여권 주류가 중요 법안에 대해서는 상임위원장을 거치지 않고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것도 그가 명분만 취할 뿐 저항할 방법이 여의치 않다는 한계가 있다. 지난 예산안 날치기 때 UAE 파병동의안, 서울대법인화법, 과학기술기본법 등은 모두 상임위 상정을 거치지 않고 직권 상정 후 강행 처리된 바 있다. FTA 비준안 처리를 두고 여당 상임위원장을 제쳐 두고 국회의장이 직권 상정하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면 여당 대 여당의 사투가 벌어져 국정이 표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남 위원장은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에 대한 책임자 규명을 줄곧 요구해왔다. 하지만 ‘형님’ 권력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계속 변죽만 울려온 게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FTA 비준안 처리 모험은 철옹성 같은 주류의 권력 구도를 깨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 날치기 정국의 후유증으로 터져 나온 FTA 처리 정국은 주류-비주류간의 끊임없는 권력 쟁투의 또 다른 전장인 셈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FTA비준 정부에 안 끌려갈 것”
남경필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은 FTA 처리 정국의 핵심 인물이다. 그의 의사봉에 따라 이명박 정권 최대 핵심과제인 한미 FTA가 순항할지, 아니면 끝없는 정부-의회의 갈등 속에 표류할지 결정되기 때문이다. 남 위원장과의 몇 차례 전화 인터뷰를 통해 주류를 향한 ‘날선’ 계획을 들어봤다.
―한미 FTA 비준안에 대한 ‘여야 합의 처리’를 선언한 배경은.
▲(비준안이) 국익과 산업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해야 하고 미국 사정과 처리과정도 지켜봐야 한다. 미국이 의회를 중심으로 쇠고기 문제를 다시 들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 미국 상원이 상정을 반대하거나 쇠고기 재협상 조건으로 비준안 처리를 들고 나올 경우 우리는 또다시 곤혹스런 상황에 빠질 수 있다. 미국의 비준과정을 충분히 지켜보겠다.
―최근 청와대나 이재오 특임장관 쪽에서 ‘한미 FTA 비준을 서두르자’는 얘기가 나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전체적으로 정부 쪽에서는 애당초 빨리 하자는 분위기였는데 국익 부분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다 납득하는 분위기다. 내가 워낙 또 강하게 얘기하고 그러니까 정부 측의 스탠스도 서두르지 말자는 쪽으로 가는 것 같다.
―청와대 분위기는 국회가 또 국가 중요 정책에 대해 어깃장을 놓는다며 불만인 것 같다.
▲어깃장이라고 봐선 안 된다. 의회가 해야 될 일들이니까. 비준안 처리는 국회의 고유 권한이다. 정부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나는 정부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작업은 하겠지만 정부가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는다고 해서 쫓아갈 생각은 전혀 없다(남 위원장은 이 대목에서 ‘정부에 끌려갈 생각이 전혀 없음’을 거듭 밝혔을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미국의 비준안 처리 결과를 보고 나서 하면 한정 없이 늦어질 수도 있지 않나.
▲양국이 서로 프로세스를 보면서 맞춰 나가야 한다. 지난번 첫 번째 협상에서는 우리가 선도해서 가고 미국이 따라오는 방식을 취하려다가 안 된 것이고, 이번에는 추가협상을 우리가 응해줬기 때문에 미국이 좀 선도하고 우리가 한 반 발 쫓아가는 모양새가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다.
―미국에서 비공식 채널을 통해 남 위원장을 접촉한 것으로 안다.
▲외교적으로 외부에 알리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공식적인 채널이 직접 한두 차례 찾아와서 와서 내 의견을 청취해갔다. 내가 제일 중요하게 보는 인사가 맥스 보커스 미 상원 재무위원회 위원장이다(민주당 소속인 그는 한미 FTA 이행법안 처리와 관련해 중요한 자리로 꼽히는 재무위원장으로서 쇠고기시장 개방에 대한 진전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한미 FTA 의회 비준에 반대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쳐 우리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런 존재로 알려지고 있음). 그 사람이 계속 쇠고기 시장의 완전 개방 없이는 한미 FTA를 지지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미국 측에 ‘더 이상 쇠고기 이야기 안 하겠다는 언급이 없으면 나는 상종 못 한다’고 강하게 얘기했다.
―당시 미국 측의 반응은.
▲내 의견을 들으러 왔기 때문에 별다른 언급 없었다. 그런데 미국은 의회가 권한을 가지고 있고 그걸 정부에게 약간 이양한 것이고 미국 의회가 반대를 하면 정부가 따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반면 우리는 정부가 협상권한을 갖고 국회는 비준권을 가지고 있지만 협상은 전부 정부의 권한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의회가 반대한다는 게 굉장히 큰 변수가 될 수 있다. 미국 의회 상황을 잘 봐야 한다. 지금도 맥스 보커스 외에도 공화당 측에서 나오는 얘기가(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콜롬비아 등과 먼저 FTA 비준 처리를 한 뒤 한국과는 나중에 하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면 굉장히 늦어진다. 이것도 우리가 준비를 잘 해야 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