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쏜다> |
연말이 괴로운 직장인들이 있다. 크고 작은 술자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원래 술을 즐기면 그나마 낫지만 그도 아니면 술자리 자체가 고역인 법. 싫다고 무조건 거절할 수도 없다. 때문에 나름대로 술자리를 모면할 방법을 찾게 된다. 고난이도의 연기력도 필요하고 가족들과의 합동작전도 요구된다. 한 가지만으로는 위험하고 연말에는 적어도 서너 가지의 대비책을 마련해 놔야 한다. 알코올이 싫은 젊은 직장인, 그들의 눈물겨운 ‘술세례’ 피하는 법을 모아봤다.
소나기는 피하라고, 아무리 술을 좋아해도 술자리가 연이어 계속될 때는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이때 가장 유용한 것이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섬유업체에 근무하는 K 씨(33)는 술자리로 이동하면서 아내에게 전화를 해 사전모의를 한다. 이제는 둘 다 연기력이 수준급이라고.
“오늘 몇 시쯤에 술자리에 가니까 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문자로 신호를 보내면 바로 전화를 해달라고 얘기해요. 특별히 문자로 신호를 안 보내도 몇 개월 안 된 아기가 울 때는 아내가 알아서 전화를 합니다. 이때 영상통화를 하면 아기 우는 소리나 안절부절 못하는 아내 얼굴을 직장동료도 보니까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무작정 잡지는 못하죠. 아니면 술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 문자로 신호를 보내고 전화가 오면 당황하는 얼굴로 바로 일어납니다. 아주 급한 얼굴로 그냥 가보겠다고 하고 가는 게 포인트예요. 우물쭈물하면 들통 날 확률이 높거든요. 집에서 전화만 오면 일어난다고 해서 공처가로 놀림은 받지만 다음날 쓰린 배를 움켜잡고 출근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컨설팅회사에 근무하는 Y 씨(여·27)는 단 한 번의 거짓 연기로 편한 마음으로 술자리에 가게 됐다고 귀띔했다. 술을 좋아하지 않아 입사 전부터 고민이 많았는데 첫 회식자리에서 크게 한 건을 하고 고민을 덜게 됐단다.
“첫 직장인데, 주변에서 사회생활을 하면 회식도 많고 괜히 빠지면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고 겁을 주더라고요. 제가 생각해도 상사가 주는 술을 마냥 거절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입사 후 첫 회식에서 마음을 다잡고 일단 분위기를 띄우면서 술을 잘 마시는 것처럼 하면서 시끄럽게 굴었어요. 동시에 폭탄주 두 잔 정도를 한 번에 비웠어요. 그리고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바로 뒤로 넘어갔습니다. 동료들이 놀라서 막 깨웠지만 그냥 기절한 척했죠. 결국 업혀서 집에 도착했는데요, 사실 그거 다 연기였거든요. 주말 보내고 출근했더니 다들 괜찮은지 걱정하기에 원래 술을 잘 못 마시는 데다 조금만 마셔도 그렇게 된다고 쐐기를 박았죠.”
Y 씨는 요즘 회식자리에서 가서도 일부러 빼지 않고 더 나선다. 그러면 오히려 상사가 못 마시게 말린다고. 그는 “기절하는 척하면서 솔직히 먹힐지 반신반의했는데 지금은 억지로 마시지 않아도 되고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도 별 말이 없어 너무 편하다”고 보탰다. 건강상의 이유도 술자리 피하는 방법으로 애용된다. 큰돈 들여 먹고 있는 한약도 좋은 핑계가 되고 연말에 맞춰 사랑니를 빼는 것도 한 방법이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D 씨(여·28)도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술자리에서 곱게 빠질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가벼운 알레르기성 피부염이 있어요. 일상생활에는 거의 지장이 없는데 피부가 온도 차이에 민감한 편이죠. 일단 회식일 전날 사우나에 가서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면 좁쌀 같은 두드러기가 올라와요. 원래 그냥 두면 몇 시간 있다 사라지는데 회식에 대비해서 팔과 다리를 막 긁어요. 남한테 보여줄 수 있는 부위니까요. 좀 무식한 방법이긴 한데 그렇게 하면 다음날 붉은 딱지도 앉고 해서 다소 징그럽게 보이거든요. 회식자리에서 괴로운 얼굴로 앉아 있다가 두드러기가 올라온 팔이나 다리를 보여주면 그걸로 끝이에요. 몇 번을 반복하면 ‘아, 얘는 술 마시면 안 되는 애’로 인식이 돼서 회식자리 가서도 아주 편안하게 맛있는 안주만 먹다 올 수 있어서 좋네요. 뭐 무리수가 있긴 하지만 만족합니다.”
무역회사 영업팀에 근무하는 H 씨(31)도 연말이 다가오면 슬슬 준비를 한다. 평소에도 워낙 접대 등 술자리가 많은 터에 연말이 되면 괴로움이 더 커지기 때문이라고.
“한동안 거래처와 술자리가 계속되는 것처럼 설레발을 쳐요. 일단 주변에 무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거죠. 그리고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났다 싶었을 때 출근하자마자 책상에 푹 쓰러져요. 그럼 다들 이유를 물을 것이고 아무래도 위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괴로움을 호소하고 바로 병원으로 갑니다. 병원에 가면 그냥 열이 좀 있다면서 감기 증상으로 처방전을 받고 약국에서 위장약을 한 보따리 사는 거예요. 그 왜 빨아먹는 거 있잖아요. 회사에 복귀해서는 심각한 얼굴로 위에 구멍이 났다고, 큰 병 되기 싫으면 자제하라는 의사의 경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쉽습니다. 술자리에서 가서 적당히 한두 잔 마시고 살짝 찡그린 얼굴을 하면 그때부터는 제가 마시겠다고 해도 옆에서 말립니다.”
술자리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것도 애용되는 방법이다. 외식업체에 근무하는 L 씨(30)는 주로 이 방법을 이용한다. 소규모 회식자리에서는 친한 사람들끼리라 주량 조절도 가능하고 혹 빠져도 티가 나서 안 되는 방법이지만 인원이 많은 회식자리에서는 잘 통한단다.
“회식 있는 날은 가방을 집에 두고 가거나 회식장소에 들어갈 때 카운터에 가방을 맡깁니다. 식사 후 어느 정도 술잔이 돌고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하기 바쁠 때가 옵니다. 화장실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도 많은 시점이죠. 그럴 때 그냥 조용히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맡겨놓은 가방을 들고 나오면 됩니다. 상사한테 인사를 하고 일어나겠다는 ‘착한 생각’은 그냥 그 자리에 있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당연히 붙잡지, 어서 가라고 할 상사가 있나요? 사실 조용히 가도 다음날 회사에서 왜 먼저 갔느냐고 질타를 하는 상사도 거의 없어요.”
술자리에 일가견이 있다는 디자이너 M 씨(여·34)는 “술자리에서 주당들과 맞은편이 아니라 같은 줄, 되도록 멀리 떨어진 문가 쪽에 자리를 잡는 것이 술세례 피하기의 핵심”이라며 “정말 술자리가 힘들다면 가장 중요한 건 술을 못 마신다고 제대로 말하고 정식으로 양해를 구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