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채권단이 현대그룹과의 매각 협상을 사실상 끝내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가 물 건너간 듯하다. 현대상선의 프랑스 나티시스은행 예금 1조 2000억 원에 대한 현대그룹의 자료 제출이 미흡하다고 판단한 채권단이 강수를 꺼내든 것이다. 현대건설 인수가 무산될 경우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현대상선은 물론 그룹 경영권마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사활을 걸어온 현대건설 인수 무산 위기 앞에 놓인 현정은 회장의 속내를 들여다봤다.
현대건설 채권단 운영위원회는 지난 12월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현대그룹과 맺은 현대건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에 대한 양해각서(MOU) 해지 안건과 주식매매계약 체결 승인 안건 등을 주주협의회에 상정했다고 밝혔다. 주식매매계약 체결 승인 안건은 채권단 80%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가결된다. 채권단에서 20% 이상 의결권을 가진 외환은행과 정책금융공사, 우리은행 등 어느 한 곳만 반대해도 현대그룹과 주식매매계약이 체결될 수 없다.
이로써 현대그룹은 지난 11월 16일 현대건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지 한 달여 만에 인수 자격을 빼앗길 처지다. 현대그룹 측은 “법과 입찰규정을 무시한 일방적 폭거”라며 반발하고 나섰지만 재계와 금융권에선 현대그룹 입장이 갈수록 곤란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본입찰 땐 나티시스은행 예금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던 채권단이 이제 와서 같은 문제로 현대그룹의 발목을 잡는 것을 의아하게 보는 시각도 있다. 일각에선 정치 외압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한다. 최근 청와대 한 고위 인사가 사석에서 “현대건설 인수 가격을 무리하게 적어낸 현대그룹이 뒷감당을 해낼지 의문”이라며 부정적 정서를 피력했다고 전해진다. 역대 대형 M&A(인수·합병) 때마다 외압 논란이 줄곧 있었던 터라 채권단의 태도 변화에 대한 정치적 해석 역시 수그러들지 않는 모습이다.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 현정은 회장은 그룹 경영권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현대건설은 현대그룹 지배구조 핵심인 현대상선 지분 7.22%(보통주 기준)를 보유하고 있다. 현 회장과 ‘앙숙’인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상선 지분 22.14%를 갖고 있고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도 4.27%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언제든지 현 회장의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는 셈이다.
게다가 그간 현 회장에게 온정적이었던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마저 이번 인수전 과정에서 등을 돌렸다는 점이 현 회장에게 작지 않은 부담이 될 듯하다.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전 막판에 뛰어들면서 자금력에서 앞서는 정 회장이 인수전 승자가 될 경우 현대건설 보유 현대상선 지분을 현 회장에게 양보할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했다. 실제로 현대차 내부에서 이 같은 방안이 검토됐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현대그룹은 인수전 기간 동안 ‘현대건설을 경영권 승계 도구로 활용하지 않겠다’는 등 현대차 상황을 빗댄 광고를 대대적으로 내보내며 현대차의 신경을 긁은 것은 물론 소송전까지 벌였다. 만약 예비협상대상자인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의 새 주인이 될 경우 현대차-현대중공업-KCC 등 범 현대가가 지니게 될 현대상선 지분은 33.63%나 된다. 정몽헌 회장 사후 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현 회장에 대한 경영권 침공 이상 가는 지분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셈이다.
현대그룹 측은 채권단이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MOU를 해지할 상황에 대비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MOU 해지 금지가처분 신청을 내놓은 상태다. 여기에 현대그룹이 채권단 고소 등 가능한 법적 조치를 모두 동원할 경우 이번 인수전은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 수 있다. 재계에선 현 회장 측이 국면 장기화를 통해 현대건설 인수 자격 재취득을 도모하는 한편 차선책으로 현대상선 경영권 수성을 위한 시간과 자금을 확보하려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최악의 경우 현대건설 인수 자금으로 활용하려 쌓아놓은 실탄을 현대상선 경영권 방어용으로 쏟아 부을 수도 있는 셈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