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벌인 전쟁의 전모를 들여다보면 흡사 기업을 소재로 한 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한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에스텍은 자동차, 통신용, 가전기기 스피커를 생산하는 업체고, 동성화학은 신발용, 합성피혁용 폴리우레탄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회사. 얼핏 보아서는 이 두 회사의 영역이 판이하게 달라 이들 간에 어떻게 경영권 다툼이 일어날 수 있는지가 의아할 정도다.
문제는 거래소 상장법인인 동성화학이 지난해 말 코스닥에 막 입성한 에스텍을 ‘찜’하면서 시작됐다.
더욱이 이들이 벌인 M&A전쟁은 증권가에 또 하나의 역사를 쓰기도 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최첨단 M&A 기법이 동원된 데다가, 각종 소송이 줄을 잇는 등 숱한 화제를 낳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벌여온 7개월간의 암투는 지난해 11월16일, 알짜배기 중소기업으로 알려진 에스텍이 코스닥에 상장되면서 시작됐다.
에스텍은 경남 양산시에 본사를 둔 업체로 자동차에 들어가는 스피커를 주로 생산하는 업체다. 원래 이 회사는 LG정밀의 한 사업부였다.
에스텍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99년 LG정밀의 음향사업부문이 그룹으로부터 분사했고, 당시 이 사업부문의 책임자였던 김충지 전무(현 사장)와 임직원 4백여 명이 나와 세운 회사가 에스텍이라는 것.
이 회사는 김 사장이 전체 지분의 8%, 나머지 임직원들이 각각 지분을 가진 100% 종업원 지주회사였다.
이 회사는 LG그룹으로부터 분사한 이후에도 경영실적이 좋아 업계의 알짜배기 회사로 소문이 파다했다. 연 평균 매출이 9백억원(지난 2001년 9백94억, 2002년 8백98억, 2003년 8백83억원), 순익이 60억원(지난 2001년 54억원, 2002년 56억원, 2003년 70억원)을 웃돌 정도였다.
지난해 말 이 회사의 종업원들은 코스닥 상장을 계기로 회사 사정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4개월 뒤에 이 회사는 대표적인 M&A 먹잇감으로 꼽히며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했다.
지난해 11월 공모 당시 무명의 수산물 관련 회사인 ‘인성실업’이 공모주의 반 이상인 1백46만여 주를 사들인 것이 단초였다. 에스텍측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인성실업과 접촉을 했으나 ‘단순 투자목적’이라는 얘기를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3개월 뒤 본격적인 M&A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회사의 최대주주가 된 인성실업과 몇몇 관계자들이 이 회사의 지분을 동성화학에 통째로 넘겨버린 것이다.
상장된 지 불과 3개월 만에 에스텍의 최대주주는 김충지 사장에서 인성실업으로, 다시 동성화학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에스텍 관계자는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가 코스닥에 상장할 때부터 (에스텍이) M&A시장에 먹잇감으로 나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최대주주가 바뀐 것이 아니었다. 최대주주가 된 동성화학이 공개적으로 “경영권 확보차원에서 주식을 매집했다”고 밝힌 것.
에스텍으로서는 부푼 꿈을 꾸고 코스닥에 상장하자마자, 3개월 만에 다른 회사에 경영권을 뺏길 위기에 처한 것이다.
▲ M&A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난 에스텍이 입주해 있는 구로동 에이스테크노타워3차 건물.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즈음 에스텍측에서는 애시당초 인성실업이 회사 지분을 인수한 것은 동성화학의 고난이도의 M&A전략이었다는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에스텍이 그냥 당할 리 없었다. 에스텍은 이후 거꾸로 장내에서 동성화학의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M&A 맞불작전’이 불붙은 것이다.
덕분에 지난 7월경 이 두 회사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들의 전쟁 속에서 회사 주식이 연속 상한가를 기록, 일주일 만에 주가가 3배 이상 뛰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결국 지난 8월 에스텍은 동성화학의 주식 12.4%(47만여 주)를 보유, 주요주주가 됐다. 동성화학은 에스텍의 최대주주가 되고, 에스텍은 동성화학의 주요주주가 된 것이다.
증권가 관계자는 “현행법상 한 회사가 다른 회사의 지분을 10% 이상 확보할 경우, 서로 상호지분에 대해서는 의결권 행사를 제한받는다”고 설명했다.
동성화학이나 에스텍이나 서로 상대방의 회사에 대해 주총장에서 의결권을 잃는다는 얘기다. 결국 에스텍의 역습으로 동성화학의 꿈이 무산될 위기였다.
그러나 동성화학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동성화학은 이 지분을 자사의 관계사인 ‘오토리움’에 대여한 것. 지분을 대여받은 오토리움이 대신 에스텍의 주총장에서 의결권을 행사하려는 전략이었다.
다 끝난 싸움이라고 한숨 돌리던 에스텍은 발끈했다. 에스텍은 이번에는 법적 소송을 제기했다.
에스텍 관계자는 “동성화학이 편법적인 방법으로 주식 의결권을 행사하려는 것이 분명하다”며 “법원에 ‘의결권 행사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에 위협당할 동성화학 역시 아니었다. 동성화학 관계자는 “에스텍이 협력사들을 통해 대량의 우호지분을 확보한 이후에도 이를 공시하지 않았다”며 “에스텍의 불법행위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두 회사의 경영권을 둘러싼 전쟁을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결국 동성화학은 법원의 결정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대표이사 해임건’ 등을 안건으로 최대주주의 자격으로 임시주총을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주총이 열리기 하루 전 날, 법원은 에스텍의 손을 들어줬다. 동성화학이 우회적인 방법으로 에스텍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에스텍 관계자는 “지난 9월15일 주총에서 회사가 적대적 M&A에 휘말리지 않도록 이사회 구성을 오히려 탄탄히 했다”며 “7개월간의 긴 전쟁이 끝났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동성화학은 아직도 에스텍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분위기다. 동성화학 관계자는 “법원의 결정에 불복, 조만간 항고하겠다”고 말했다.
알짜배기 중소기업을 둘러싼 경영권 분쟁이 2라운드에 접어들지는 지켜봐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