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왼쪽)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오너 CEO(최고경영자)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이 최근 자서전을 펴냈다. 제목은 <스틱 투 잇, Stick to It!>(동아일보사). ‘힘내! 포기하지 마’라는 뜻이다. 치열하게 오늘을 사는 이들, 특히 여성들에게 주는 응원 메시지를 담았다. 이보다 10여 일 전, 명운을 걸고 현대건설 인수전에 임하고 있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평전 <이기지 못할 도전은 없다>(메디치)도 출간됐다. 비슷한 길을 걸어온 두 여성 오너 CEO의 책이 비슷한 시기에 나온 셈이다. 책을 통해 드러난 두 사람의 경영 여정을 조명했다.
장영신 회장이 애경 창업주인 남편(채몽인 사장)의 사망 소식을 들은 것은 1970년 7월 2일. 막내아들을 낳은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장 회장의 나이 34세. 이후 그는 두문불출한 채 아이들하고만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날이 까마득해 자신도 모르게 멍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어느 날 큰아들(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이 “엄마, 걱정 마. 이 앞에서 학생들 상대로 뽑기 장사 하면 되잖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장 회장은 그런 아들이 대견하고 안쓰러워 안고 펑펑 울었다. 남편이 죽은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흘린 눈물이었다. 애경을 두고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 그때였다.
남편이 타계한 지 1주기가 되던 날 회사 경영에 참여할 결심을 굳히고 아무도 모르게 경리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경리학원 6개월 과정을 수료한 장 회장은 회사 경영 참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애나 잘 키우라” “회사가 망할 것”이라는 회사 임원의 말까지 들어야 했다. 장 회장은 경영진 곁에서 차근차근 경영을 익혀나갈 생각이었지만 몇몇 임원이 회사를 떠나면서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출근 첫날 장 회장은 영락없는 왕따 신세였다. 회의석상에서 오가는 말을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어 가시방석의 고역을 견뎌야 했다. 장 회장은 회사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업무를 파악할 방법을 궁리하다가 밤에 서류를 보겠다는 생각에 서류를 한 보따리씩 싸들고 출퇴근했다.
혼자 서류를 끌어안고 끙끙대던 장 회장은 고민 끝에 정공법을 택했다. 서류를 기안한 담당자를 직접 불러 모르는 것을 솔직하게 물어보는 방법이었다. 직위를 가리지 않고 물어가며 배우고 서류뭉치를 싸들고 퇴근해 고시공부를 하듯 하나하나 업무를 익혀나간 지 1년쯤 되자 회사 전반의 업무가 파악됐고 경영에 대해서도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남편의 급작스런 사망과 경영참여’라는 공식은 현정은 회장의 경우도 장영신 회장과 같다. 그러나 현 회장은 장 회장보다 더 절박했고 더 전격적이었다. 2003년 8월 4일 새벽 비서실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현 회장은 훗날 지인에게 “처음엔 애 아빠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미처 슬퍼할 겨를도 없이 문상객을 맞았다. 사실 현 회장은 남편 사망 직후까지만 해도 자신이 직접 경영에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위기가 그를 깨어나게 했다. 시숙부인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가 경영권을 위협한 것이다.
경영권 분쟁의 발단은 남편 정몽헌 회장이 생전에 받은 대출. 이 대출에 정 명예회장이 보증을 서면서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등을 담보로 잡힌 것이다. 정 명예회장은 부채가 많다는 이유로 현 회장에게 상속포기를 종용했다고 한다. 상속을 포기하면 현대엘리베이터는 정 명예회장 것이 되는 상황이었다. “아, 이 분이 설마 회사를?” 그때부터 현 회장은 위기의식이 강하게 들었고 용기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만류하는 정 명예회장을 뿌리치고 현대엘리베이터 이사회 의장에 취임하게 된다. 남편의 49재를 지낸 지 꼭 한 달 되는 날인 10월 21의 일이었다.
현 회장이 취임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크나큰 위기가 닥쳤다. KCC가 “현대엘리베이터 우호지분이 50%가 넘는다”며 현대그룹을 공식적으로 인수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당시 현 회장은 안팎으로 호된 시련과 혼란을 겪으면서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는지 어금니가 빠질 정도였다. 불안감에 자신도 모르게 자다가 깨서 이를 꽉 물었더니 그리 된 것이다. 그룹 내에서도 KCC와 타협하자는 여론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장단 회의에서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더 이상 다른 얘기는 하지 말라”면서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현 회장의 정면돌파 카드는 현대엘리베이터의 ‘국민기업화’였다. 국민주를 발행해 KCC 쪽 지분율을 희석시키겠다는 전략. 이는 법원의 제동으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KCC 쪽 또한 특정 기업 지분을 5% 이상 매입할 경우 5일 이내에 공시해야 하는 ‘5%룰’을 지키지 않았고, 현대그룹은 이를 집중 공격해 금감원의 지분 처분 명령을 받아냈다. 이후 주주총회에서 77.8%의 찬성을 얻으면서 현 회장은 KCC와의 경영권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토록 어려웠던 경영참여 초기 현 회장에게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되어준 인물이 바로 장영신 회장이다. 현 회장은 자신과 유사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일어선 장 회장을 떠올리며 용기를 냈다. 현 회장이 매일 퇴근할 때 업무 관련 서류를 보따리에 싸와 밤새 공부한 것도 장 회장을 닮았다. 공부를 하다가 혼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기면 부하직원에게 묻고 또 물은 것도, 공식 석상에서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경영참여 초기 장영신 회장도 큰 위기를 겪었다. 바로 1973년 말 전 세계를 휩쓴 오일쇼크였다. 당시 회사 전체가 흔들렸지만 직격탄을 맞은 곳이 화학원료사업을 담당하는 삼경화성(현 애경유화)이었다. 오일쇼크로 원유 가격이 5배 이상 폭등하면서 원료공급이 중단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장 회장은 거래관계도 없는 미국 최대 석유회사 걸프사에 물물중개를 요청하기로 했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묘안이지만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장 회장은 당장 한국에 파견 나온 걸프사 임원을 만났다. “그런 일을 왜 우리에게 부탁하느냐”는 걸프사 측의 질문에 장 회장은 “삼경화성은 한국의 석유화학사업 발전에 크게 기여할 기업이다. 한국의 석유화학사업이 발전해야 걸프사에도 이익이 될 게 아니냐”라고 말했다. 걸프사 임원들의 표정에는 당혹스러움이 역력했다. 한동안 정적이 흐르고 걸프사 임원으로부터 “좋다. 도와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걸프사의 주선으로 원료를 공급받아 장 회장은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냈고 경영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KCC와의 경영권 분쟁을 마무리하고 정상궤도에 오르는 듯했던 현정은 회장의 시련도 계속됐다. 시동생인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그룹과 치른 현대상선 경영권 분쟁, 김윤규 부회장의 퇴출과 북한과의 갈등, 관광객 피살사건 등으로 인한 금강산 관광 중단…. 고비 때마다 현 회장은 뚝심으로 넘겼지만 그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재 수렁 속에 빠져버린 현대건설 인수전이 그것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현대상선 지분 7.22%(보통주 기준)를 가진 현대건설을 시아주버니인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에게 뺏기면 또 다시 경영권을 위협받는다. 이렇게 절치부심하고 있는 현 회장에게, 어려울 때 힘이 돼 준 장영신 회장의 책 제목 ‘스틱 투 잇’이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을 듯하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