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6월 21일에 미네소타에서 태어난 제인 러셀은 9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정정한 ‘할리우드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57년 전 마릴린 먼로와 함께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1953)에서 쇼걸로 등장해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던 제인 러셀. 정점은 이때였고 그녀는 서서히 하락했다.
러셀이 배우가 될 수 있었던 건 전직 배우였던 어머니 제럴딘 덕분이었다. 틴에이저 시절 아버지를 잃으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던 러셀이지만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그녀에게 연기 수업을 시켰고 미래를 준비하게 했다. 18세 때 치과 접수처에서 일했던 러셀. 이 병원의 손님 중엔 항공 산업으로 유명했던 당대의 거물 하워드 휴즈가 있었다. 휴즈는 영화산업에도 큰 관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창구에 앉아 있는 러셀을 보고 한눈에 매료되어 무려 7년짜리 계약을 한다. 아무런 연기 경력도 없는 신인에겐 파격적인 일이었다.
러셀에 대한 휴즈의 집착은 페티시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듯 솟아 있는 러셀의 바스트에 대해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가슴”이라고 말했고 그녀의 데뷔작 <무법자>(1943)는 서부극이었지만 오로지 러셀의 가슴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가득 찬 영화였다. 급기야 휴즈는 브래지어 개발에 항공 엔지니어까지 동원했고 그렇게 개발된 봉합선이 없는 브래지어는 시대를 앞선 발명품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보수적 검열은 108장면에 걸쳐 수정 명령을 내렸고 휴즈는 수학자를 고용해 다른 영화의 여배우들과 러셀의 가슴 노출 수위를 비교하기까지 했다.
1940년에 완성된 영화는 끊임없는 재촬영과 재편집을 거쳐 1943년에 개봉되었고 휴즈는 러셀의 두 가슴을 지칭하며 “러셀을 보러 극장에 가야 하는 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리고 두 가지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가슴에 대한 휴즈의 집착은 계속되는데 <프렌치 라인>(1954) 같은 영화는 러셀에게 노골적으로 가슴을 강조한 의상을 입힌 3D 영화였고 심지어 그 헤드카피는 “제인 러셀을 보라. 그녀는 당신의 두 눈을 모두 후려칠 것이다!”였다.
▲ 마릴린 먼로와 함께 출연했던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의 한 장면. |
‘38-25-36’(정점에 달했을 땐 ‘39-26-38’이었다) 사이즈로 1940~50년대 할리우드의 ‘풍만함의 대명사’였던 러셀은 지나칠 정도로 그 재능이 과소평가된 배우였다. 30세가 넘어서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로 그녀의 재치와 노래 실력이 대중과 평단에게 인정받았지만 대부분의 영화에서 그녀의 재능은 허접한 캐릭터로 낭비되었다. 그녀는 휴즈에 의해 데뷔했지만 휴즈에게 묶여 있었던 기간만 없었다면 훨씬 더 뛰어난 배우로 기억될 인물이었다.
결국 그녀는 영화보다는 클럽 무대에서 쇼를 하거나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하는 데 더 열중한다. 사회 활동도 활발했다. 틴에이저 시절 잘못된 낙태 수술로 불임이 된 그녀는 세 아이를 입양했는데 1956년엔 입양 단체를 결성해 현재까지 5만 명 이상의 입양을 성사시켰다.
1970년대 제인 러셀은 CF를 통해 다시 한 번 대중의 이목을 끈다. 플레이텍스에서 개발한 풍만한 여성들을 위한 브래지어의 광고에 출연하며 이 제품의 대변인 역할을 하게 된 제인 러셀. 처음 각인된 이미지는 그녀를 계속 따라다녔던 셈이다.
제인 러셀은 충실하면서도 아름다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2006년엔 85세의 나이에 할리우드의 한 클럽에서 쇼를 이끌며, 녹슬지 않은 노래 솜씨로 찬사를 받기도 했다. 내년이면 90세가 되는 은막의 전설은 파란만장한 삶을 조용히 마감하고 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