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복싱협회가 100주년을 맞아 제작한 기념 포스터.
[일요신문] 대한복싱협회가 선거 과정에서 후보 간 담합행위가 드러난 회장 당선인에 대해 이사회 인준을 거부하자, 대한체육회가 해당 당선자를 회장으로 인준하라고 압력을 행사해 파문이 일고 있다.
대한복싱협회는 새로운 신임 회장을 선출하기 위해 2020년 11월에 ‘2020 임시대의원총회’를 갖고 그해 12월 29일을 선거일로 공고했다. 이후 후보자 등록 기간을 거쳐 지난 1월 4일 단독출마한 윤 아무개 씨가 회장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곧이어 파행이 시작됐다. 회장에 단독출마해 당선된 윤 씨와 또 다른 출마 예정자인 배 아무개 씨가 선거일 이전에 서로 공모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배 씨는 지난 1월 5일 회장 선거 입후보 등록 마감날 불출마했고, 윤 씨가 무투표로 당선됐다.
당선인 윤 씨는 지난해 12월 14일 복싱협회 관계자 A 씨와의 통화에서 “서울에서 선거 관계로 찾아왔다. 배 씨가 (자신이) 출마하지 않을 테니 수석부회장과 임원 구성을 위임해 달라고 (나에게) 요구했다”고 말했다.
이어 같은 해 12월 29일 윤 씨는 A 씨에게 “나는 명함만 필요하다. 사업상 명함이 필요한 것이지, 협회 운영은 복싱인이 하면 된다”고도 했다. 복싱협회를 자신의 원만한 사업추진을 위한 도구로 삼으려고 한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대한복싱협회는 이 같은 당선자 윤 씨의 불순한 의도를 알아채고는 이사회 논의를 거쳐 당선무효를 결정했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윤 씨는 서울동부지방법원에 ‘당선무효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후 법원은 올해 4월 6일 “윤 씨에 대한 회장 당선무효 결정 효력을 윤 씨와 대한복싱협회 사이의 본안 판결 확정 시까지 정지한다. 윤 씨의 당선자의 지위에 있음을 임시로 정한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이사회에 포괄적인 심의·의결권을 부여하고 있기는 하나, 선거에 관련한 사항은 제외된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대한복싱협회 회원들은 즉각 반박하고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하는 등 협회 회장 선출 과정의 부정을 밝히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이 가속화되자 이번에는 상급단체인 대한체육회가 개입했다.
대한체육회는 지난 4월 7일 산하단체인 대한복싱협회에 공문을 보내 “회장 선거와 관련한 가처분 소송판결에 따라 협회는 조속히 구비서류를 갖춰 회장에 대해 대한체육회 인준을 받으시기 바란다, 지시한 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권리사항을 제한하거나 체육회의 지원금 또는 지원사항을 중단, 회수, 감액 등의 불이익 처분을 할 수 있다”고 통지했다. 사실상 불법선거로 당선된 게 의심되는 윤 씨를 회장으로 속히 결정하라는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대한복싱협회 선거관리위원회는 대한체육회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지난 4월 30일 윤 씨의 당선무효를 전격 결정했다. 이어 5월 4일 “윤 씨와 배 씨의 각 지방협회 사임 시기, 사임 후의 각 선거 관련 행보, 윤 씨의 입후보 전 언행, 배 씨 입후보 미등록 경위 등에 비춰 윤 씨가 대한체육회 회장선거 관리규정 제23조 제2호로 규정하고 있는 매수 및 이해유도 금지를 위반한 것으로 판단되므로, 같은 규정 제35조 제1항 제1호 가목에 따른 ‘당선무효’로 제재한다”고 공고했다.
대한복싱협회 관계자 A 씨는 “한국복싱 역사가 100년이 됐다. 100년의 역사에 회장선거에서 ‘직책 나눠 먹기’와 관련한 부정은 없었다. 초유의 담합선거다”라며 “재선거를 통해 정당성을 가진 회장을 재선출하는 것만이 협회를 정상화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대한복싱협회 회장 당선인 윤 씨는 “대한복싱협회 선거관리위원회가 당선증을 교부할 때에는 문제가 없기에 그랬던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한 뒤 “복싱 관계자와의 대화 내용이 녹취돼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법원의 이의신청이 기각돼 대한체육회가 최종 인준하면 협회 집행부를 꾸려 대한복싱협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고 말했다.
대한체육회 관계자는 “(법원의) 가처분 소송 판결에 따라 인준을 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것”이라고 밝혔다.
정민규 부산/경남 기자 ilyo3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