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작고한 남편을 대신해 회사 경영에 나선 여성 CEO들이 늘고 있다. 지난 2003년 11월 현정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이 KCC와의 경영권 분쟁과 관련헤 기자회견하는 모습. | ||
이 같은 현상은 과거 오너인 남편이 작고할 경우 2세가 경영을 맡거나, 아니면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뒷전에 물러났던 것과 다른 양태여서 주목된다. 이에 대해 경제전문가들은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상당수 기업 안주인들이 고학력이라는 점이 여성들의 경영참여를 늘어나게 하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홀로 된 여인들의 대표적인 경영참여 사례는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유원건설 박경자 회장, 대신증권 이어룡 회장 등이다. 또 대한전선 설원량 회장의 부인 양귀애씨도 지난 3월 설 회장이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뒤 회사 고문으로 취임해 사실상 대한전선그룹의 경영을 주도하고 있다.
▲ 이어룡 회장 | ||
지난 추석 직전 대신그룹 양회문 회장이 갑작스레 작고했다. 양 회장의 부친이자 대신증권그룹 창업주인 양재봉 명예회장이 아직 생존해 있는데 아들이 먼저 세상을 뜬 것. 향년 54세였고, 사인은 폐암이었다.
대신그룹의 경우 이미 후계구도가 끝난 상태라 일반인들의 관심은 재산분할 구도가 다시 짜일 것이냐에 관심이 쏠렸다. 대답은 노(NO).
양 명예회장의 2세간 재산분할은 큰사위가 대신경제연구소, 둘째사위가 대신투신운용을 맡아 사실상 독립경영을 하는 방식으로 이미 끝난 상태였다.
가장 덩치가 큰 대신증권은 양 명예회장의 차남인 양회문 회장이 생전에 물려받았고, 양 회장의 유족들은 대신증권의 경영에 형제나 사위 등이 참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족들이 내세운 카드는 양회문 회장의 부인인 이어룡씨. 이씨가 회장 직함을 달고 경영일선에 나선 것이다. 고 양 회장은 슬하에 2남1녀가 있지만 아들들이 모두 대학생으로 경영일선에 나서기에는 아직 어렸다.
때문에 대신쪽에선 당분간 고 양 회장과 입사 동기생인 김대송 사장(75년 입사, 대신증권 공채 1기)이 경영 일선을 책임지고, 이 회장은 과거 양회문 회장이 했던 것처럼 경영 전반을 관할하는 회장 역할을 나눠맡아 경영에는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대신에선 이 회장이 3년 전 양 회장의 암 발병 사실이 확인됐을 때부터 미래 경영수업을 받았다고 밝혔다. 양 회장이 ‘유사시’를 대비해 회사의 전반적인 상황과 어디를 챙겨야 하는지에 대해서 따로 ‘수업’을 시켰다는 것.
남편 장례식이 끝난 뒤 이 회장은 여의도 대신증권 3층 사무실로 매일 출근하며 경영을 챙기고 있다.
이 회장의 당면 최대 과제는 툭하면 불거지는 인수합병설을 잠재우는 것. 이 회장 일가가 대신증권의 지분 9.8%를 가진 최대 주주이긴 하지만 외국인 지분이 30%가 넘고 그에 비해 최대주주의 지분은 낮아 인수합병설이 심심찮게 흘러나오곤 했다. 물론 대신측에선 우호지분까지 합치면 합병은 불가능하다고 반박하고 있다. 일단 고 양 회장의 지분은 아들들에게 넘어갈 것으로 알려졌다.
▲ 박경자 회장 | ||
중견 건설그룹인 유원그룹도 지난 6월부터 미망인인 박경자 회장 체제로 전환했다. 평소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강 회장이 급작스레 사망한 데에는 평소 앓고 있던 혈액 관련 희귀 질병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든 남편이 급작스레 세상을 뜨자 구원투수로 박 회장이 등판했다. 박 회장 역시 남편 사망 전에는 회사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한양대 건축공학과를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해, 인테리어를 전공했다. 성신여대에서 5년간 강의를 하기도 하고 실내장식사 자격증을 갖고 있으며, 사회복지법인인 한국여성의 집 관장을 맡는 등 외부활동을 한 적이 있지만 건설 관련 일을 해본 경험은 없다.
하지만 남편이 사망한 지 한 달 만에 유원건설의 최고 경영자로 나선 박 회장은 최근 인도에서 대형 교량공사를 수주하는 등 경영행보에 탄력을 붙이고 있다.
박 회장의 1남3녀 중 아들은 아직 대학에 다니고 있고 유일하게 둘째딸(32)이 기획조정실장으로 모친을 돕고 있다.
현대그룹 현정은회장
남편의 급작스런 사망 뒤에 그룹의 수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경우에서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현 회장은 지난 2003년 여름 세상을 버린 남편의 뒤를 이어 ‘시숙의 난’을 딛고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방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대엘리베이터의 회장으로 현대그룹을 이끌고 있는 현 회장은 지난 3월 주총에서 경영권 분쟁을 승리로 이끌고,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이나 현대엘리베이터 등의 경영상태도 호전되고 현대아산 문제도 큰 어려움 없이 풀어가고 있어 경영현장에 연착륙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 시숙인 정상영 KCC 회장과의 M&A문제가 완전 매듭된 상태가 아니어서 그의 경영행보에는 여전히 걸림돌이 남아 있다.
대한전선 양귀애고문
지난 3월 진로소주 인수와 쌍방울 인수 등 큰 현안을 앞두고 세상을 뜬 설원량 대한전선그룹 회장의 후사도 재계의 관심사였다.
설 회장이 진행하고 있던 두 인수합병건이 워낙 덩치가 컸던 데다 대한전선이 최근 몇 년간 채권시장에서 발군의 솜씨와 만만치 않은 현금 동원력을 보여줬고, 그 과정에서 설 회장이 깊숙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 회장이 62세에 불과하고 자녀들도 학생 신분이다.
대한전선은 설 회장의 급작스런 타계 이후 경리부와 설 회장의 비서실장을 거친 관리통인 임정욱 사장을 대표이사로 내세우는 한편 설 회장의 부인인 양귀애씨를 지난 4월부터 그룹 고문으로 임명했다. 양 고문의 경우 공식 직함은 맡지 않았지만 회사의 전반적인 경영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그의 섭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양 고문은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의 누이동생으로 슬하에 아들이 두 명있다. 양 고문의 남편인 설원량 회장이 고 설경동 대한산업그룹 창업주의 3남이었던 점에 비추어보면 재벌가끼리의 혼사였던 셈이다.
현재 장남은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 4학년에 재학중이며, 차남은 미국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57세인 양 고문의 급선무는 설 회장이 추진했던 진로 인수를 성공하는 것과 경영권 분쟁을 끝낸 쌍방울(무주리조트 포함)의 경영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엔 경영권을 이어받을 게 확실한 두 아들이 경영 일선에 투입될 때까지 대한전선그룹을 흔들림 없이 이끌어야 한다는 것도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