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최근 인사를 통해 신진 세력을 대거 요직에 등용, 눈길을 끌고 있다. |
최태원 SK그룹 회장(51)이 최근 인사를 통해 대대적인 세대교체의 닻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최 회장 친동생인 최재원 부회장(48)이 수석부회장으로 승진한 데 이어 최태원-최재원 형제 또래의 신진 세력이 요직에 대거 등용됐다. 특히 최 회장의 신진 측근으로 평가받는 인사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반면 김신배 부회장 등 지난 10년간 SK를 이끌어온 가신그룹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형제경영’과 ‘젊은 피’를 내세워 물갈이에 나선 최태원 회장의 노림수를 들여다봤다.
지난 12월 24일 총 105명의 임원 승진을 발표한 SK그룹 정기인사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최태원 회장 동생 최재원 부회장의 입지 강화다. 최 부회장은 신설된 그룹 부회장단을 이끄는 수석부회장을 꿰찼다. 명실상부한 그룹 내 2인자로 올라선 것이다.
SK그룹의 새 컨트롤타워 격인 부회장단엔 김신배 SK C&C 부회장(57)을 비롯해 정만원 SK텔레콤 사장(59)과 박영호 SK㈜ 사장(64)이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합류했다. 최상훈 SK가스 사장(59)과 김용흠 SK에너지 사장(59)도 사장이지만 부회장단에 포함됐다.
신설된 부회장단에 속한 인사들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각 계열사 경영자들의 활동을 보좌하고 지원하는 부회장단 업무에 주력하게 된다. 부회장단이 SK그룹의 향후 성장 방향 설정과 인재 발굴에 주력할 것이라지만 부회장단 멤버들이 세대교체 명분하에 일선에서 밀려났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김신배 부회장은 지난 10년여에 걸쳐 SK그룹 핵심인 SK텔레콤과 SK C&C를 이끌어온 인물이다. 정만원 부회장 역시 최 회장 선친 최종현 회장의 최측근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의 신임을 받으며 SK네트웍스 SK텔레콤 등의 대표이사를 거쳤다. 박영호 부회장은 최태원 회장의 미국 시카고대학교 대학원 동문으로 주목받으며 SK㈜ 대표이사를 지냈다. 지난 10년간 SK를 이끌었던 인사들이 이선 후퇴와 동시에 최재원 부회장 휘하에 들어갔다는 점은 ‘형제경영’을 통한 직할체제 강화에 대한 최 회장의 의지를 드러낸 대목으로 평가받는다.
최 회장은 가신그룹이 비운 핵심 계열사 CEO(최고경영자) 자리를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인사들로 채워 넣으면서 그룹 내 주류세력 교체 의지를 보였다. 이번에 중용된 ‘젊은 피’들이 대부분 최 회장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가장 눈에 띄는 인사는 SK의 신성장 사업 발굴을 이끌 SK㈜ G&G(Global & Growth)추진단을 맡은 유정준 사장이다. 대기업의 신사업추진단 수장은 흔히 오너의 신뢰가 각별한 인사가 맡는 편이다. 1962년생으로 새해 49세가 되는 유 사장은 이번 인사에서 가장 젊은 승진 대상자이기도 하다. 맥킨지컨설팅 출신인 유 사장은 LG건설(현 GS건설) 이사를 지내다가 1998년 SK㈜ 상무보로 영입됐다. 최태원 회장이 직접 나서 영입했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가 돈독하다고 한다.
최 회장의 고려대학교 후배이기도 한 유 사장은 최 회장을 일생일대의 위기로 몰아넣은 이른바 ‘소버린 사태’를 해결한 주역이기도 하다. 해외 투기자본 소버린자산운용이 최 회장의 경영권을 위협했던 지난 2003년 당시 SK㈜의 최고재무책임자(CFO)로서 채권단과의 협상을 진두지휘했다. 경영권 분쟁 사태 당시 보여준 위기관리 능력이 최 회장의 신뢰를 배가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유 사장은 SK 입사 8년 만인 지난 2006년 연말 인사에서 44세 나이로 부사장에 올랐다. 당시 그가 맡은 직책은 SK가 글로벌 헤드쿼터로 설립한 SKI(SK International)의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비즈니스를 총괄하는 자리였다. 이듬해 45세 나이로 SK에너지 사장에 올랐고 이번 인사를 통해 SK㈜ G&G추진단 사장을 맡으며 최 회장의 글로벌 경영 최선봉에 서게 됐다.
1961년생인 서진우 신임 SK텔레콤 플랫폼 담당 사장도 최 회장이 내세우는 신진 주류로 주목받는다. 서 사장은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삼성전자에 잠시 근무했다가 1989년 유공(현 SK에너지) 정보통신투자관리팀에 입사했다. 이후 주로 SK텔레콤과 SK커뮤니케이션즈에서 정보통신 관련 업무를 했으며 무선인터넷 업체 와이더댄 대표이사와 SK커뮤니케이션즈 사장, SK텔레콤 신규사업부문장을 거쳤다.
서 사장에 대한 최태원 회장의 신뢰는 그의 와이더댄 대표이사 재직 경력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서 사장은 2000년 6월부터 2005년 1월까지 이 회사 대표이사를 지내며 SK커뮤니케이션즈 대표이사, SK텔레콤 신규사업부문장 등을 겸직했다. 와이더댄은 한때 최태원 회장 지분율이 49%였던 곳이다. 오너의 개인회사나 다름없는 곳의 대표이사직을 맡을 정도로 오너의 신뢰가 컸던 셈이다.
서 사장의 와이더댄 재직 기간 동안 SK텔레콤의 최 회장 와이더댄 지분 인수설도 나왔으나 여론의 반대 등에 부딪쳐 결국 지분을 제삼자에 매각했다. 이후 2006년 미국의 디지털미디어서비스 업체 리얼네트웍스가 와이더댄 경영권을 인수했다.
이번 인사를 통해 SK텔레콤 총괄의 중책을 맡게 된 하성민 사장 또한 최 회장의 기대를 받는 인물이다. 1957년생인 하 사장은 1982년 SK의 전신인 선경에 입사해 2002년 이후 SK텔레콤에 줄곧 몸담으며 전략기획부문장 경영지원부문장 코퍼레이트센터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하 사장은 그룹 내 대표적인 재무 전문가로 SK텔레콤의 성장을 가능케 한 대형 M&A(인수·합병)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지난 2002년 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 합병에 이어 2007년 하나로텔레콤(현 SK브로드밴드) 인수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최 회장의 신뢰를 얻었다는 후문이다.
자신과 연배가 비슷한 신진세력을 그룹 전면에 내세운 최태원 회장은 올해 6월 그의 지배력을 공고히 할 지주회사제 완성을 앞두고 있다. 한때 소버린 사태로 경영권 침탈 위기까지 몰렸던 최 회장은 어느덧 여타 재벌 총수 부럽지 않은 지분 보유를 통해 견고한 지배구조를 갖춘 상태다. 그러나 조직 장악력에선 아직 선친 때만큼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뤄왔다.
지난 1998년 선친 최종현 회장 타계 이후 최태원 회장이 그룹을 이끌게 됐지만 공동 회장이었던 손길승 현 SK텔레콤 명예회장의 영향력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2003년엔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분식회계 혐의로 옥고를 치르면서 그룹 장악력을 다지는 데 애를 먹기도 했다.
이번 인사를 통해 오랜 가신그룹을 경영일선에서 밀어내고 친동생과 신진 측근들을 대거 내세운 최 회장. 그가 날로 커지는 그룹 위상만큼이나 그룹 내 자신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을지 재계의 뜨거운 시선이 SK그룹으로 향하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
▲ 최재원 부회장. |
우린 그들과 달라요 달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동생 최재원 부회장을 앞세운 ‘형제경영’ 카드를 들고 나오면서 재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최근 수년간 형제경영과 관련해 구설수에 오른 재벌들이 많았던 탓이다.
형제경영이 재계의 화두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사건은 지난 2005년 두산그룹 ‘형제의 난’이었다. 두산가 장남 박용곤 명예회장이 차남 고 박용오 전 회장에게 그룹 회장직을 3남 박용성 회장에게 넘길 것을 요구하자 고 박 전 회장이 두산가 오너들의 비리 내역을 검찰에 제출하면서 벌어진 사건이다.
한진가 역시 지난 2002년 조중훈 창업주 타계 이후로 유산분배에 불만을 품은 차남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과 4남 조정호 메리츠금융 회장이 장남 조양호 한진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며 눈길을 끌어왔다. “선친 뜻에 따라 유산이 분배됐다”는 조양호 회장 측과 “조양호 회장이 대한항공 등 알짜 계열사를 불합리하게 독식했다”는 조남호-조정호 회장의 주장이 맞부딪친 것이다.
지난 2009년 벌어진 금호아시아나그룹 형제간 다툼도 세간의 화젯거리였다. 금호가 3남 박삼구 회장과 4남 박찬구 회장이 계열사 지분 보유 문제 등을 겪으며 등을 돌리고 지금은 서로 독립경영을 강화하고 있다. 그동안 금호가 4형제가 주요 계열사 지분을 균등하게 나눠오던 관례가 깨지면서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형제경영을 표방했다가 다툼을 겪은 두산 한진 금호아시아나의 오너 형제들과 같은 분란이 SK에서도 되풀이될 가능성은 일단 낮아 보인다. 무엇보다 최재원 부회장에겐 최태원 회장의 지배력을 넘볼 만한 지분이 없는 까닭에서다.
지난 1998년 최종현 2대 회장이 타계하면서 장남인 최태원 회장이 총수직을 승계했고 고 최종건 초대 회장 아들들인 최신원 SKC 회장과 최창원 SK케미칼 부회장도 각자 지분을 챙기면서 분가 관측을 낳아왔다. 최신원-최창원 형제를 상대로 최태원-최재원 형제가 결속돼 있다는 점도 SK 형제경영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대목일 것이다.
최재원 부회장은 SK㈜ SK텔레콤 SKC SK가스 등 여러 계열사를 거치며 현장경험을 쌓았다. 지난 2008년 그룹 글로벌위원회 위원장에 이어 2009년 SK㈜ 공동 대표이사, SK텔레콤 등기이사에 오르며 그룹 전면에 나선 그에 대한 현장의 평가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그룹 안팎에선 최재원 부회장에 대해 “특유의 추진력만큼은 최태원 회장을 능가한다”고 평가할 정도다.
항간에선 최재원 부회장을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친동생 구본준 LG전자 대표이사 부회장과 비교하기도 한다. 구 부회장은 여러 계열사를 거쳐 지난 10월 그룹 주력인 LG전자 CEO에 올랐으며 그룹 내 자파세력도 상당한 편이다. 구 부회장은 그룹 지주사인 ㈜LG 지분 7.63%를 보유해 구본무 회장(10.72%)에 이어 2대주주에 올라있기도 하다. 눈에 띄는 지분이 없는 최 부회장에 비해 그룹 내 입지에선 앞선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롱런 가능성에선 최재원 부회장 쪽에 무게가 쏠릴 듯하다. LG에선 현재 구 회장 양자 구광모 LG전자 과장(33)이 한창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그룹 안팎에선 구광모 과장의 성장 과정과 구본준 부회장의 향후 입지가 어떻게 맞물려 돌아갈지에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반면 최태원 회장 슬하의 윤정 씨(22)와 민정 씨(20) 그리고 아들 인근 군(16) 1남 2녀는 아직 어린 나이다. 최 회장 자녀들이 경영에 참여하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