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정부는 분위기 쇄신을 위해 교체 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윤증현 재정부 장관을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전격 유임시켰다. 사진은 지난 5일 범금융기관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윤 장관.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윤증현 재정부 장관은 지난해 11월 서울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사실상 용퇴하는 방향으로 정리가 돼가고 있었다. 윤 장관이 그동안 ‘한국 경제호’를 잘 이끌어 원만하게 경제위기를 넘겼다는 점, 집권 4년차에 접어드는 2011년 비상경제체제를 평시경제체제로 환원키로 한 점 등에서 윤 장관의 교체를 통한 분위기 쇄신이 점쳐졌다. 일각에서는 윤 장관이 재정부 장관 업무와 G20 준비를 동시에 하면서 정신적, 신체적 피로가 쌓인 점도 고려 대상으로 언급됐다.
하지만 연평도 포격 도발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윤 장관을 대신해 재정부 수장이 될 만한 인물들 중에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것. 대통령과 여당 대표, 국무총리 등 여권 지도부가 대거 군 미필인 상황에서 경제 수장마저 미필 출신을 내세울 경우 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윤 장관도 군 면제이기는 하지만 이미 청문회를 통과했다는 점, 야당과의 원만한 관계, 재정부에 대한 장악력, 시장 신뢰 등을 감안하면 현재 상황에서 대타를 찾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린 셈이다.
이런 변화된 분위기는 지난 12월 27일 있었던 재정부 간부들과 기자들 간의 송년회부터 감지됐다. 윤 장관은 이 자리에서 “내년에는 이런 자리에서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말은 했지만 퇴임을 앞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윤 장관은 임종룡 1차관이 인사말에서 “내년에도 이런 자리를 가지고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자 흐뭇한 미소를 띠며 쳐다보기도 했다. 재정부 장관과 임기를 같이하는 경제정책 국장이 유임된 것도 이러한 관측을 짙게 했다. 새로운 경제부처 인사가 발표되고 윤 장관의 유임이 결정되면서 재정부 내에서는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이 때문인지 윤 장관이 새해를 맞아 지난 4일 기자단과 신년오찬을 갖는 자리에는 이례적으로 주무과장들이 대거 참석하는 일이 벌어졌다. 윤 장관의 지시라고는 하지만 역시 ‘살아있는 불’이라는 것이 확인되면서 주무과장들이 우르르 몰려나온 것이다. 참석자가 대거 늘면서 기자들과 재정부 관계자들을 합쳐 100명이 넘는 인사들이 이날 점심을 함께했다.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 내정자는 부활에 부활을 거듭하면서 ‘꺼진 불’의 위력과 ‘강만수 파워’를 동시에 보여줬다. 수출 우선주의자이자 고환율주의자로 평가되는 최 내정자는 노무현 정부 시절 외환시장에 개입했다가 1조 8000억 원의 손실을 정부에 안기고 세계은행으로 ‘유배’를 떠났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당선 직후 강만수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의 부름에 응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합류한 그는 재정부 1차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재정부 차관을 맡은 뒤에도 고환율 정책을 지휘했지만 유가 등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고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4개월 만에 낙마했다. 이후 주필리핀 대사로 다시 유랑을 떠났으나 대통령 경제수석으로 복귀했고, 그로부터 8개월 만에 지식경제부 장관 내정자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수출 5000억 달러, 무역 1조 달러’를 올해 경제 목표로 내건 이명박 정부에 있어 최 장관 내정자만큼 주파수가 맞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 작용한 셈이다. 여기에 대통령의 경제 심복인 강만수 경제특보가 극히 아끼는 후배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최 내정자가 요즘 대통령이 강조하는 대중소기업 상생에도 주력해온 점 역시 지경부 장관으로 가는 데 점수를 보탰다는 평가다.
하지만 지경부 관료들은 이번 인사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가 당황하고 있다. 차관과 장관 자리를 모두 외부 인사에게 내놓게 된 때문이다.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이 자원을 담당하는 지경부 2차관으로 온 뒤 내심 내부 인사가 장관 자리에 오르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사람이 장관에 내정된 것이다. 또 지난 크리스마스 때 세금으로 지경부 직원들과 대기업 직원들 간 맞선파티를 열었다가 도마에 오른 상태에서 대중소기업 상생을 강조하는 최 수석이 장관으로 온 것도 걱정거리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실세 장관과 차관을 얻게 된 만큼 지경부의 힘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최 내정자는 수출과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에 중점을 두고, 박 차관은 자원외교를 책임지는 구도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또 ‘최틀러’로 불릴 정도로 장악력과 추진력이 강한 최 내정자 정도 돼야 대통령 심복으로 알려진 박 차관을 휘하에 두고 부처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김석동 신임 금융위원장은 ‘꺼진 불과 강만수’라는 단어를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사다. 강만수 경제특보가 외환위기로 자리에서 물러난 뒤 쓴 회고록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서 헌신적이었던 공무원을 두 명 들었다. 그 사람이 바로 최중경 내정자와 김석동 금융위원장이다. 강만수 경제특보가 칭찬했던 두 사람이 모두 화려하게 부활한 셈이다.
영문 이니셜인 ‘SD’로 불리는 김 위원장은 최 내정자와 달리 지난 정부에서 부침이 없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재경부 금융정책국장을 맡은 뒤 1년여 뒤 1급인 금융정보분석원장, 4개월 뒤 재경부 차관보에 임명됐다. 또 1년 4개월 뒤에는 금감위 부위원장, 2007년에는 재경부 1차관으로 승승장구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이명박 정부에서는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곳에 눈길을 두지 않고 농협경제연구소 대표를 지낸 뒤 서초동에 개인사무실을 여는 등 미래를 준비했다. 결국 이명박 정부 4년차에 들어서 금융위원장으로 다시 관료인생의 2막을 열게 됐다.
정부부처 관계자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던 해에 김대중 정부에서 일하던 한 고위 공직자가 물러나면서 ‘나를 과대평가해서 실망하지 말고 과소평가해서 실수하지도 말라’는 말을 남겼다”면서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바뀐 뒤 진행된 각종 인사를 보면서 이 말의 담긴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게 됐다. 당시에 후배들에게 웃자고 한 이야기였지만 지금 보면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공무원들이 마음속에 새겨둬야 할 명언”이라고 말했다.
김서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