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신년사에서 ‘시련은 있어도 결코 실패는 없다’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을 꺼내들었다. |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50부(부장판사 최성준)는 지난 4일 ‘배타적 우선협상권자의 권리와 지위를 보전해 달라’며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채권단을 상대로 낸 양해각서(MOU) 해지금지 등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현대그룹은 법원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법원 판결 후 현대그룹은 “항고를 통해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대그룹은 항고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본안 소송 등을 통해 장기전도 불사한다는 각오다.
그러나 본안 소송에 간다고 하더라도 현대그룹이 대세를 뒤집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재계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일단 결론이 언제 날지 알 수 없는 데다 그 전에 현대건설이 현대차그룹의 품에 안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당장 지난 7일 현대건설 채권단은 현대차그룹에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부여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현대그룹 측이 겉으로는 ‘현대건설 인수를 위해 끝까지 간다’고 외치지만 이제 경영권 방어 등 ‘출구전략’에 들어섰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현대그룹은 ‘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현대로지엠→현대엘리베이터’로 이어지는 순환 출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어느 한 계열사라도 경영권을 위협받으면 나머지 계열사도 어려워질 수 있다는 얘기다. 때문에 현대그룹은 현대건설 인수전 과정에서 만약의 사태에 꾸준히 대비를 해왔다. 이미 그룹 지배구조의 핵이자 이번 인수전의 큰 논란거리였던 현대상선 경영권을 안정권에 올려놓았다.
지난 4일 금융감독원 공시에 따르면 현대상선은 지난 12월 실시한 3264억 원 규모(1020만 주)의 유상증자로 현정은 회장 우호지분이 유상증자 전 40.78%에서 42.99%로 증가했다. 반면 현 회장의 경영권을 위협했던 현대중공업그룹과 KCC 지분은 유상증자 불참 및 지분매각으로 기존 30.49%에서 27.77%로, 약 2.72%p 감소했다.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할 경우 현대건설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 7.75%(증자 전 8.3%)를 더한다고 해도 양측 간 지분 차이는 7.38%p나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변수가 등장했다.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의 2대 주주 ‘쉰들러’가 지분을 계속 늘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쉰들러는 지난해 9월 25.8%였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점차 매입해 현재(지난해 12월 27일 공시)는 35.27%까지 이르렀다. 쉰들러는 조만간 시행할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주배정 유상증자에 참여해 추가 지분 매입을 할 것으로 보인다.
증권가에서는 쉰들러의 지분 확보가 현대엘리베이터 경영에 참여하기 위한 수순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에 맞서 현대그룹 측도 지분을 매집해 4일 현재 현대로지엠 등 최대주주 지분율을 50.06%로 늘렸다. 일견 경영권 방어에 문제가 없어 보이는 수치고 현대그룹 측도 그렇게 말한다. 그럼에도 현대그룹 측이 계속 지분을 매입하는 것은 그만큼 불안하다는 반증이라는 관측도 있다.
현대그룹의 또 다른 당면 과제는 이달로 예정된 것으로 알려진 국세청의 세무조사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일부 언론에서 세무조사 관련 보도가 있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돼 해당 매체에 강력하게 항의했다”고 주장했다. 국세청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세무조사에 착수하지는 않았지만 최근 관련 인사를 접촉하며 현대그룹 관련 정보를 모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국세청이 세무조사에 착수한다면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는 현대그룹 해외자금의 실체가 드러날지 관심이 모아진다. 현대그룹은 이번 입찰에서 총 5조 5100억 원을 써냈고 이중 1조 2000억 원이 프랑스 나티시스은행으로부터 빌린 대출금이라고 밝힌 바 있다. 현대그룹은 사실상 이 대출 자료를 제출하지 않아 MOU를 해지당한 셈이다. 큰 논란이 된 만큼 세무조사가 진행될 경우 국세청이 이 자금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재계 일각의 관측이다.
현대그룹은 현정은 회장이 지난 2009년 8월 방북 직후 스티븐스 주한 미국 대사를 만나 “북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은 장애물에 직면했다”고 말하는 등 정부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는 외교 전문이 최근 공개되면서 정치적 부담까지 안게 됐다. 2011년 신년사에서 ‘시련은 있어도 결코 실패는 없다’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을 꺼내든 현정은 회장. 그가 2003년 경영참여부터 계속돼온 시련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