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과 수도권에 전세난이 강타하면서 곳곳에서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사진은 강남지역 부동산 중개업체들. |
전셋집을 계약하기 위해 수백만 원의 현금을 들고 다니는 사람부터 부동산중개수수료로 수백만 원을 지출하는 ‘전세 부르주아’도 생겨났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과 방을 나눠 쓰는 ‘하우스셰어’가 유행처럼 번지는가 하면 임대주택 입주를 미끼로 철거민주택을 알선하는 ‘철거주택 딱지’도 생겨났다.
지난 13일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서울 및 수도권의 전셋집을 구하는 세입자들 사이에는 이사 갈 전셋집을 보지도 않고 계약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보다 먼저 계약을 하기 위해 수백만 원에 달하는 현금을 들고 다니는 이들이 늘었다고 한다. 부동산중개업자들 사이에도 전세물건을 잡기 위해 전셋집을 찾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전에 중개업소에서 계약금을 걸고 가계약을 체결한 후 세입자를 찾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서울 논현동에 사는 주부 이 아무개 씨(34)는 “전셋집을 구경까지 한 후 다음날 계약을 하러 중개사무소에 갔는데, 반나절 사이에 다른 사람이 500만 원을 더 주고 계약을 했다”면서 “그 사건 이후 밖에 나갈 때마다 인감도장과 현금 100만 원을 챙겨들고 전셋집을 보러 다닌다”고 말했다.
전세시장의 빈익빈 부익부도 심해졌다. 서울 서초구 잠원동 터미널공인의 김희진 사장은 “전세가가 오르면서 아예 집을 사버리는 부잣집 마나님과 올라버린 전세가 탓에 낡은 집을 알아보는 주부들이 교차한다”면서 “전세 끼고 집을 사려는 매수인과 전세가가 올라 그 집을 비워주는 세입자의 자녀가 친한 친구인 해프닝도 봤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전세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서울 강남과 서초구에서는 아파트 전세의 ‘법정중개수수료 0.3%’ 개념이 사라졌다. 강남권의 웬만한 아파트 전세가가 전세보증금의 0.3%라는 법정수수료의 한도액인 3억 원을 넘어버린 탓이다.
지난달 반포동에 전셋집을 구했다는 한 주부는 “원촌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녀석 때문에 대출까지 받아가며 전세를 얻었더니 중개수수료로 또 300만 원이 넘는 돈을 내라고 한다”면서 “전셋집 구하느라 고생한 만큼 (부동산중개사무소에서) 0.5%는 받아야 한다고 해 어쩔 수 없었다. 현금이 지갑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생각하니 속이 쓰리다”고 하소연했다.
전셋집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보니 3억 원 이하 전세중개에도 경쟁이 붙었다. 고가전세처럼 중개수수료율이 0.5∼0.8%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라도 빨리 전셋집을 구하려면 소위 말하는 ‘뒷돈’을 찔러줘야 한다는 설명이다. 서울 여의도에 집을 구한 한 회사원은 “두 달 넘게 전세를 구하느라 진이 빠진 와중에 부동산에 추가 수수료를 지급하겠다고 한 후에야 겨우 집을 구할 수 있었다”면서 “진짜 좋은 물건은 몰래 챙겨놓는 얌체 같은 중개업자들도 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금이 부족한 대학생과 솔로 직장인 사이에는 소위 ‘하우스메이트’나 ‘하우스셰어’라고 불리는 ‘전전세’가 성행하고 있다. 전세 대신 월세, 오른 전세금만큼 월세로 내는 ‘반전세’로 계약을 바꾸면서 기존의 세입자들이 월세를 충당하기 위해 같이 살 사람을 구하는 셈이다.
광화문 인근에 직장을 둔 김 아무개 씨(31)는 1억 원짜리 전세를 월세로 전환하면서 하우스메이트 구하기에 나섰다. 김 씨는 “전세로 있다가 갑자기 한 달에 50만 원씩 지출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부담이 컸다”면서 “방 하나에 50만 원 정도 받을 요량으로 사람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오른 전세금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부모님 집으로 다시 들어가는 젊은 부부도 늘었다. 서울 신정동의 양 아무개 할아버지(67)는 “전셋집을 고민하는 큰딸을 설득해 집을 합치기로 했다”면서 “따로 사는 게 아무래도 편하겠지만 자식들이 돈 때문에 마음 고생하는 것을 보니 내 가슴이 더 답답하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세난으로 서울시의 장기전세주택(시프트)의 청약경쟁률이 수백 대 일에 육박하면서 임대주택에 입주할 수 있는 철거민특별공급을 알선하는 기획부동산도 생겨났다. 서울 강남역과 삼성역, 서울대입구역 신도림역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8500만 원으로 철거민특별분양으로 시프트 100% 입주’라는 문구가 적힌 전단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철거민특별분양이란 서울시의 도시정비계획구역으로 지정돼 철거되는 주택의 소유자와 세입자에게 면적에 따라 임대주택입주권을 제공하는 것. 철거민 주택은 과거 서울시가 공공분양아파트 분양권을 지급할 때만 해도 소위 ‘금딱지’라고 불리며 인기를 끌었지만, 분양권 대신 임대아파트 입주권으로 지급조건이 바뀌면서 소위 ‘물딱지’로 전락했다.
철거민 주택을 알선한다고 밝힌 한 중개업자는 “도심 맞벌이부부가 시프트를 받는 건 복권 당첨이나 다름없다”면서 “8000만 원만 수수료로 내면 내후년에는 우면 세곡 강남권 시프트에 입주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이런 중개업자의 말과 달리 특별공급자를 선정하는 지방자치단체는 난색을 표한다. 서초구청 복지과 관계자는 “신청자가 많아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라면서 “국토해양부의 훈령에 따라 순위를 정하기 때문에 해당주택을 구입했다고 반드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최근 전세수요가 급증한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집을 사지 않는 대기수요자들이 늘어난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또한 정부의 전세대책에도 불구하고 전세난이 올해 상반기까지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매매시장과 달리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충실히 반응하는 전세시장의 특성상 주택 공급이 원활히 이뤄지거나 수요가 급감하지 않는 이상 해법이 없는 탓이다.
닥터아파트 김주철 팀장은 “지금의 전세난은 적게는 5000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전세가를 높이면서 계약을 유지하는 중대형 선택적 수요자로 인한 것”이라면서 “선택적 수요층의 관심을 매매로 돌리지 않는 이상 전세난을 잠재우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단순히 집값 상승을 통한 거래활성화보다는 수요층들이 저가매수를 할 수 있도록 집값을 낮추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라면서 “이 경우 집값 안정화와 전세 안정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명지 파이낸셜뉴스 기자 mjkim@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