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회사에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C 씨(여·29)는 하루하루 ‘버티기’로 일관하는 상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릿하다. 언제 계약 만료가 될지 몰라 불안한 자신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회사와 불미스런 사건으로 소송까지 치렀던 상사는 퇴직 후 승자가 되어 돌아왔지만 이후가 더욱 비참해 보인단다.
“일단 그 상사에게 친절을 베풀면 회사에 등을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겨 다들 투명인간처럼 대하고 있어요. 회사에서는 지쳐서 나갈 때까지 괴롭히겠죠. 구석자리에 아무런 일거리도 주지 않습니다. 다른 여직원들은 아무 일도 안 하면서 월급은 자신들보다 많다며 툴툴거리고 커피 같은 건 좀 제 손으로 타먹지 꼭 시킨다고 볼멘소리를 하는데요, 저는 좀 안돼 보였어요. 밥도 슬쩍 나가서 혼자 해결하고 오시는 것 같아요. 누가 이런 상황에서 계속 회사에 나오고 싶겠어요. 한창 공부하는 고등학생 딸이 있다고 들었는데 다 가족 때문 아니겠어요. 만약 제가 계속 직장생활을 할 수 있다면 정말 다른 동료, 부하 직원들의 축복 속에서 아쉬움 없이 그만두고 싶어요. 지금 그 상사처럼 퇴직하고 싶진 않아요.”
외식 사업체에서 일하는 L 씨(32)도 자신의 부서 본부장을 보면 씁쓸하다. 퇴직 후의 삶이 화려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상사를 보면서 느낀다. 젊은 시절 아무리 멋지게 직장생활을 했어도 끝은 초라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자주 든단다.
“우리나라 최고의 경제 관련 기구에서 근무하면서 해외를 누볐던 분이세요. 그런 분이 퇴직 후 지금 회사에 들어와서 옛 영광은커녕 때로 비굴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부하직원들하고 있을 때는 영어도 섞어가면서 대단했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자주 하세요. 하지만 회식자리 같은 데서는 자신보다 어린 다른 상사한테 무시를 당해도 ‘헤헤’ 웃기만 하세요. 회의할 때 윗분들한테 소신 있는 발언을 계속하다가 밉보였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그 뒤로 지방 센터로 발령 나기도 했다가 몇 개월 만에 다시 복귀하기도 하시고 풍파가 참 많은 분이에요. 40대 후반에 퇴직해서 다시 재취업하기도 어렵고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자업체에 근무하는 S 씨(30)는 무료한 시간에 호기심으로 인터넷 사행 게임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얼마 전 퇴직한 상사를 떠올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40대 초반에 바닥으로 곤두박질 한 상사의 실패 원인은 바로 도박 때문이었단다.
“사람도 좋고, 괜찮은 분이었는데 메일 한 번 잘못 열었다가 퇴직까지 하게 되셨어요. 궁금한 마음에 들어갔다가 중독으로 이어진 모양이에요. 아내 몰래 대출까지 받아다가 할 정도로 인터넷 도박에 푹 빠져서 집까지 날리고 회사에서도 불성실한 근무태도로 계속 지적을 받다 결국 퇴사하셨어요. 아무리 40대 퇴직 바람이 분다지만 우리 회사는 탄탄한 중소기업이라 성실하게 일하면 비교적 정년까지 무난한 편이거든요. 그 상사를 보면서 절대 닮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모든 퇴직 사례가 이렇게 살벌하지는 않다. 부하직원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아름답게 퇴직하는 직장인들도 있다.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는 O 씨(여·28)는 지난해 퇴직한 팀장이 바로 그런 상사였다고 이야기했다.
“대학도 수석으로 졸업하고 외국에서 오래 근무하다가 한국에 스카우트 되어 온 분이셨어요. 골드미스로 외모도 출중하시고 자기관리도 철저한 분이셨죠. 업무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요. 참 배울 것이 많은 상사였어요. 은퇴하신다고 했을 때 굉장히 아쉬웠는데 한편으로는 부러웠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셔서 남은 인생을 좀 즐기며 살아야겠다고 하셨거든요. 남은 날이 더 많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 얻은 보상처럼 보였어요. 요즘도 가끔씩 연락을 하는데요, 여행도 다니시고 그간 바빠서 배우지 못했던 것들도 마음껏 할 수 있어 좋다고 하시더군요.”
디자인업체에 근무하는 K 씨(여·27)도 며칠 전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같이 일하던 팀장이 퇴직 후 시작한 카페가 자리를 잡았다고 놀러오라는 전갈을 보낸 것.
“보통 직장생활에서 볼 때는 나이에 비해 조금 이른 퇴직이지만 비서직으로 40대까지 하는 경우도 드물거든요. 그만큼 꼼꼼한 일처리가 돋보이는 분이셨어요. 회사를 그만두시고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커피전문점을 오픈하셨대요. 조용한 편인 데다 그간 직장생활만 하셔서 힘들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기우였어요. 비서 시절의 노하우를 살려서 서비스도 잘하시고 인테리어도 감각이 있어서 단골들이 꽤 생겼대요. 예쁜 카페를 운영하는 거 사실 여자들의 로망이잖아요. 퇴직 후에도 가정주부로 안주하지 않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자체가 대단해 보였는데요, 제 기준에서 여자 직장인으로는 최고의 퇴직 사례인 것 같아요.”
본받을 만한 최고의 퇴직이 또 있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E 씨(31)는 마흔 중반에 당당하게 사표를 낸 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부장님이 존경스럽기만 하다. 바쁜 직장생활 틈틈이 공부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회사에 다니실 때부터 부장님은 퇴직 후를 준비하셨던 거 같아요. 늘 뭔가를 공부하고 계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실내 조경에 관한 것이었어요. 개인적으로도 화초 기르기를 좋아하셨고, 요새는 베란다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추세라 앞으로 가능성도 크다고 보셨던 거 같아요. 외국에 나가서 자격증까지 따고 오시더니 관련 서적도 출판하시더라고요. 퇴직 후 지금은 실내 조경 사업과 더불어 주부들 대상으로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어요. 저는 지금 퇴직을 생각하면 그저 막막하기만 한데요, 부장님 보면서 느낀 것도 많고 본받고 싶습니다.”
지난 연말 한 취업포털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정년퇴직 연령을 40대 중반이라고 느끼는 직장인이 10명 중 7명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기껏해야 채 20년이 안 되는 직장생활이지만 인생의 정년은 길게는 100세까지 크게 늘었다. 지금 젊다고 생각하는 직장인이라면 당장 퇴직 후를 준비하는 것이 결코 늦지 않음을 깨닫는 현명함이 필요한 시대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