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오 특임장관이 최근 개헌에 관련된 강의를 잇따라 여는 등 ‘개헌론’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
지난 1월 18일 밤 9시 서울 홍은동에 있는 그랜드힐튼호텔에서는 특별한 모임이 열렸다. 한나라당 친이계 의원 40여 명이 사발통문을 돌려 비밀리에 ‘신년 모임’을 가진 것. 비공개로 열렸지만 대규모 친이계 회동 사실은 즉각 언론정보망에 걸려들었다. 이 자리에서 친이계 모임 ‘함께 내일로’ 소속 의원 등 40여 명은 개헌과 당 안팎의 현안에 대해 자유발언 형식으로 열띤 토론을 벌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재오 특임장관이 이 자리에 참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회동에 대한 정치적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 장관은 당내 친이 중진모임인 ‘함께 내일로’의 요청에 따라 이 회동에 참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이날 이 장관은 의원들을 앞에 두고 개헌에 대한 필요성을 장황하게 ‘연설’했다고 한다. 또한 친이계의 실질적 좌장이 사실상 모임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회동의 무게감도 컸고 참석 의원도 많았다고 한다. 즉각 당 안팎에서는 ‘이 장관이 개헌을 빌미로 세 모으기를 하고 있다’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이날 개헌뿐 아니라 19대 총선 공천에 대해서도 밀담이 오갔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당 안팎에 미묘한 파장을 낳고 있다. 이날 회동에서 공천에 대한 이야기는 나왔지만 말한 당사자는 엇갈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 의원이 ‘이 자리에 참여한 의원은 다음 총선 공천에 걱정이 없을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주변에서는 ‘덕담 삼아 농담한 것 가지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재오 특임장관이 공천 보장 발언을 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 장관이 개헌에 대한 필요성을 장황하게 역설한 뒤 연설 말미에 갑자기 ‘여기 계시는 분들은 제가 공천은 보장합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들었다. 이 말을 듣고 나오는 의원들 일부가 이 장관이 민감한 공천 문제를 언급한 것에 대해 후유증을 우려하며 ‘저런 말은 하면 안 되는데…’ 하며 걱정을 했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당시 회동에 참석했던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뒤에 있어서 자세히 못 들었다. 일부 의원들이 들었다면 그럴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날 일부 의원들이 초반에는 “개헌이 되겠느냐”며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지만 이 장관의 연설 등이 이어지면서 회동이 끝날 때는 “한번 해보자”는, 결의에 찬 분위기로 바뀐 것으로 알려진다. 그동안 박근혜 대세론에 밀려 위축돼 있던 친이계가 대규모 회동을 가지며 분위기가 ‘업’이 되자 자연스럽게 공천에 대한 자신감이 표출되면서 그에 대한 ‘농담’도 나왔을 거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에 대해 이 장관 측은 공천 보장 발언을 적극 부인하면서 “새해를 맞아 친이계 의원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개헌 등 정국 현안에 대해 논의가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이번 40인 회동에서 공천 문제가 핫 이슈가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친이계 좌장 이 장관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친이계의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여론에 민감하고 정치 동향에 밝은 이 장관이 개헌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모르겠느냐. 알면서도 그것을 추진하는 것은 ‘개헌을 통한 확실한 줄 세우기’다. 여기에 대세론으로 느슨해진 자파의 결속력도 다질 수 있다. 특히 19대 총선 공천은 의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다. 개헌이라는 깃발은 들었지만 그 줄은 19대 총선 공천을 받는 줄이다. 세종시 문제 등 친박과 대립각을 세울 수 있는 이슈는 고갈된 상태다. 개헌이 유일하게 남은 화약고다. 개헌 정국을 조성해 이탈하려는 친이계를 묶을 수 있다. 40인 회동에서 공천이란 말이 농담 삼아 나왔지만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의원들은 거의 없었다. 저녁 9시에 열린 회동에서 40명이나 모인 것도 결국 공천에 대한 불안감 아니겠느냐. 이 장관에게 눈도장 못 받으면 힘들다는 생각을 다들 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현재로선 1월 25일 개헌 의총은 개최 여부가 불확실한 상태다. 홍준표 나경원 정두언 최고위원 등 소장파-비주류 연합군이 의총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장관은 지난 17일 여의도 한 호텔에서 한나라당 재정위원 수십 명을 상대로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한 강연을 했고, 18일 40인 회동에 이어 개헌 의총 하루 전인 2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토론회에서도 개헌과 관련된 소신을 거듭 피력한다. 1월 27일에도 국회에서 개헌 관련 강연을 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이 장관이 개헌 폭풍일정을 잡은 것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의 일전을 벌이기 위한 세 불리기라는 지적이 많다. 특히 박근혜 대세론이 영남권을 지나 충청 수도권으로 북상하면서 친이계도 자구책 차원에서 최대 계파지역인 수도권을 사수해야만 한다. 친이계는 최악의 경우 대권은 박근혜 전 대표에게 넘기더라도 19대 총선 공천은 자신들이 최대한 행사해 당권이라도 지키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공천권 행사에는 2인자 이재오 장관이 가장 근접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나 이상득 의원은 정권이양 ‘출구전략’ 때문에 섣불리 나설 수 없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나 오세훈 서울시장의 경우 확보한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결국 친이계 핵심 이재오 장관이 18대 이어 19대에서도 공천을 주도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친이계 한 의원은 이에 대해 “대선도 대선이지만 현역 의원들에겐 총선이 가장 중요하다. 박 전 대표가 만약 19대 총선에서 공천 전권을 행사하며 자신의 책임하에 치르겠다는 뜻을 분명히 할 경우 친이계와는 사생결단의 전쟁이 날 것이다. 현재로선 박 전 대표가 총선에 ‘올인’하는 소탐대실은 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친이계가 19대 총선에서 공천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시 한 번 공천 광풍이 불 것이다. 최근의 친이계 개헌 드라이브는 친박계와의 공천 전쟁을 준비하는 자파의 전력강화 훈련 성격이 짙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여당 주변에서는 ‘친이계가 박근혜 대세론에 저항하는 최후의 보루는 19대 총선 공천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내 최대 계파로서 총선 공천을 주도해 정권 재창출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반면 친박계는 개헌의 필요성엔 공감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개헌논의에는 강한 적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개헌론이 정국 주요 이슈가 될 경우 그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무대응을 할 것으로 보이는 박 전 대표가 또 한 번 ‘국정의 최대 현안을 무시하는, 대권병 걸린 사람’이라는 비난에 시달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책 대권주자로 쌓아온 좋은 이미지가 계파 갈등 유발자로 변질되는 것도 약점이다.
또한 친박계는 친이계의 개헌 드라이브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개헌을 추진하는 저의가 의심스럽다. 결국 그동안 친이계가 추진해온 ‘박근혜 죽이기’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다”라며 경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친박계는 ‘최근 친이계가 개헌론을 밀어붙이는 의도에 공천권 확보가 깔려 있다’는 것을 포착하고 있다.
친박계 한 의원은 이에 대해 “4월 재보선 결과에 따라 조기 전대론이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 친박계가 일단 이 시점에서도 선뜻 나서지는 않겠지만, 공천에 대한 자파의 필요성이 커질 경우 홍사덕 의원을 전격 내세워 당권 경쟁을 벌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멀리 대권을 보고 끝까지 현 정권과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아 친박계도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라고 말했다.
현재 친이계의 개헌 드라이브와 공천 주도 움직임에 대해 친박계의 반응은 두 가지로 엇갈린다. 박 전 대표가 여당의 차기 대권주자로서 어차피 총선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공천권을 행사해 자신의 책임하에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 친박계로서는 박 전 대표 주도로 공천을 주도하고 총선을 준비했다가 패배했을 경우 대선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공천전쟁에 소극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론도 있다. 이럴 경우 18대 공천 때와 같은 학살 수준의 불공정한 공천만 아니면 된다는 입장이다. 친박계로서는 차기 총선 공천에서 이른바 ‘주고받기’를 통해 중립지대를 형성한 뒤 대선에 올인한다는 전략이 현재로선 좀 더 유력해 보인다.
현재 소장파와 홍준표 최고위원 등 비주류 모두 이 장관의 개헌 드라이브를 반대하고 나선 것은 개헌 자체가 정치공방에 그칠 것이라는 배경도 있지만, 이 장관이 이 과정에서 공천권 헤게모니를 쥘 가능성을 더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장관도 대권주자로서 업그레이드하지 못할 경우 공천권 행사를 통한 당권 사수로 ‘꿈’을 한 단계 낮출 수 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재오 장관의 개헌정국 조성은 대부분의 정파가 반대 하고 있음에도 재보선 때까지 ‘마이 웨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 장관이 지금은 손가락으로 개헌을 가리키지만 결국 그가 바라보는 곳은 당권이라는 안전판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