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말 비자금 의혹과 관련해 검찰에 출석하고 있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왼쪽)과 작년 10월 귀국 당시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 모습.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연합뉴스 |
경찰과 대기업을 넘어 정·관계 거물급을 겨냥하고 있는 검찰의 2차 사정드라이브가 어떻게 전개될지 다각도로 취재했다.
설연휴를 보낸 검찰은 ‘함바 게이트’ 사건을 본격적으로 수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브로커 유상봉 씨(구속기소)가 주도한 함바 운영권 비리 사건은 전·현직 경찰 최고위층을 비롯해 고위공직자, 전·현직 국회의원과 전직 장관, 광역단체장, 공기업 임원 등 정·관계 유력 인사들이 대거 ‘리스트’에 올라 대형 게이트 사건으로 비화되는 듯했지만 강희락 전 경찰청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면서 검찰 수사는 답보상태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1월 27일 밤 강 전 청장이 전격 구속되면서 검찰 수사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이 사건을 수사해온 서울동부지검 형사6부는 기소까지 최장 20일간인 구속기간에 유 씨로부터 함바 운영을 위한 각종 청탁과 함께 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는 강 전 청장을 강도 높게 조사한다는 방침이다. 검찰은 또 유 씨가 자신의 주무대였던 부산과 인천 지역에서 함바 운영권 확보를 도와준 경찰 고위 간부들을 위해 강 전 청장에게 대가성 인사 청탁을 했는지도 철저히 규명할 계획이다.
검찰 일각에서는 강 전 청장에 대한 구속을 신호탄으로 그동안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됐던 인사들이 줄구속되는 등 수사 칼날이 정·관계를 정조준할 것이란 관측이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실제로 검찰은 치안감급 이상 경찰 고위 간부 외에 정·관계 유력 인사 1000여 명이 적시된 유 씨의 ‘로비 수첩’을 확보하고 범죄 혐의에 대한 기초수사를 끝마친 상태다.
특히 검찰은 유 씨와 접촉한 현직 총경급 이상 경찰 고위간부가 당초 알려진 41명보다 훨씬 많은 200명에 달한다는 유 씨의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검찰 수사가 본격화될 경우 경찰은 또다시 극심한 내홍에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길범 전 해양경찰청장, 김병철 전 울산지방경찰청장, 배건기 전 청와대 감찰팀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 조사한 검찰은 이들을 다시 불러 고강도 조사를 벌인 후 혐의가 입증되면 구속영장을 청구한다는 방침이다. 검찰은 이들 외에도 유 씨로부터 돈을 수수한 정황이 포착된 박기륜 전 치안감, 양성철 광주지방경찰청장, 박일만 전 부산청장, 박영진 전 경남청장, 김중확 전 부산청장, 이동선 전 치안감 등 전·현직 경찰 고위간부들을 줄줄이 소환조사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함바 게이트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정·관계 인사들에 대한 수사도 본 궤도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유상봉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는 정·관계 인사는 30여 명에 달한다. 정치권 인사 중에는 한나라당 이군현 의원과 민주당 조영택 의원이 유 씨로부터 후원금을 건네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해당 의원들은 후원금 수수 자체를 부인하거나 대가성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친이계 핵심인 정두언 한나라당 최고위원과 허남식 부산광역시장은 유 씨와 접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현직 차관급 기관장인 A 씨는 2008년 유 씨로부터 각종 이권 청탁과 함께 2500만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고, L 전 장관과 M 전 차관, 최영 강원랜드 사장 등도 유 씨로부터 로비를 받은 정황이 포착돼 검찰 수사선상에 올라 있다.
배 전 팀장을 비롯한 현 정부 실세그룹인 ‘S라인’(서울시청 출신)도 검찰 수사선상에 올라 있고, 이만희 청와대 치안비서관은 경기경찰청 부장 시절 강 전 청장의 소개로 유 씨와 접촉한 것으로 드러나 ‘함바 게이트’ 불똥이 자칫 청와대로 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검찰은 강 전 청장이 구속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최영 사장을 소환조사했다. 최 사장은 경찰 간부의 범주를 벗어난 인물이라는 점에서 향후 검찰 수사가 정·관계 인사를 겨냥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사정당국 일각에서는 일부 여권 실세와 차기 대권주자 등 거물급 정치인들도 검찰의 사정 레이더망에 걸려든 것으로 알려져 검찰 수사 추이에 따라 정·관계에 상당한 후폭풍을 몰고 올 것으로 관측된다.
대기업을 겨냥했던 전 방위적인 검찰 수사가 서서히 정·관계 로비 의혹을 규명하는 쪽으로 선회할 것이란 관측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지난 수개월 동안 한화와 태광그룹에 대한 전 방위적인 수사를 펼쳐 온 검찰은 이호진 태광그룹회장은 구속기소하고,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불구속기소하는 선에서 사실상 수사를 마무리했다. 111일간 진행됐던 태광그룹 비자금 수사는 이 회장이 1700억 원대의 거액을 횡령하거나 배임한 혐의는 밝혀냈지만 정·관계 로비 의혹은 규명하지 못해 ‘절반의 성공’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5개월 만에 막을 내린 한화그룹 비자금 수사 역시 김 회장을 비롯한 한화그룹 전·현직 임직원 1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선에서 수사가 종결됐다는 점에서 ‘용두사미’ 수사였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특히 대기업 수사를 진두지휘했던 남기춘 서울서부지검장은 검찰 안팎에서 ‘부실수사’ ‘과잉수사’ 논란이 일자 검찰 최고위직 인사 직전인 1월 28일 돌연 사의를 표명해 무성한 뒷말을 낳고 있다.
대기업 수사와 관련해 적잖은 상처를 입은 검찰이지만 결코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최고위직 인사와 함께 설 연휴를 보내면서 전열을 재정비한 만큼 대기업 수사와 관련한 보강수사 및 진행형인 정·관계 로비 의혹을 규명하는 데 총력전을 펼친다는 각오다. 검찰이 지난 1월 24일 김준규 검찰총장 주재로 수도권 14개 검찰청 20여 명의 특수사건 전담 부장검사가 참여한 특수부장회의를 열어 수사상황을 점검하고 향후 사정수사 방향을 논의했다는 사실은 이 같은 각오를 잘 대변하고 있다.
실제로 검찰은 태광그룹 비자금 의혹 사건과 관련해 태광 측이 4400억 원대의 비자금을 동원해 방송·금융 관련 부처 등 정·관계에 전 방위적인 금품로비를 벌였다는 정황이 포착된 만큼 구속된 이 회장을 상대로 비자금 용처를 캐내는 데 수사력을 집중할 방침이다. 검찰은 이 회장이 방송통신위원회와 금융감독위원회, 청와대, 국세청 등에 돈을 뿌렸다는 의혹과 관련해 태광그룹 임원들을 다시 소환해 비자금 용처를 캐물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검찰은 특히 ‘청와대 행정관 성접대’ 파문으로 퇴사한 케이블 계열사의 팀장급 직원이 ‘조직적 로비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태광 측에 손해배상소송까지 제기한 점에 주목하고, 로비의혹과 관련한 증거 및 단서 수집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벼랑 끝에 몰린 이 회장이 비자금의 용처 및 정·관계 로비 의혹과 관련해 ‘입’을 열 가능성을 열어놓고 보강수사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들은 이 회장이 ‘혼자 죽지 않겠다’며 비자금 뇌관을 터뜨릴 경우 정·관계는 또 다시 격랑에 휩싸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화 비자금 사건에 대해서도 검찰은 독기를 품고 있다. 1월 30일 한화 수사 결과를 브리핑한 서울서부지검 봉욱 차장검사는 사건을 담당한 실무자인 이원곤 형사5부장 등 수사 검사 6명을 모두 배석시켰다. 이 자리에서 봉 차장은 “이렇게 심한 사법방해 행위는 검찰 역사상 초유의 일”이라며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검찰은 비록 수사를 지휘한 남 지검장의 사의 표명으로 수사를 종료하지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겠다는 점도 재확인시켰다. 봉 차장은 이날 한화 사건을 ‘차명 비리와의 싸움’이라고 간결하게 정의했다. 검찰은 한화 사건 수사결과 보고서에서도 ‘차명비리’ ‘기망 경영의 종합판’이라고 성격을 규정했다. 따라서 수사과정에서 확인된 조직적인 증거인멸 등 형사사법질서 훼손 행위에 대해서는 사법정의 회복 차원에서 추가로 수사해 기소하겠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한화 비자금 사건에 대한 보강 수사 및 향후 재벌 수사에 임하는 검찰의 결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특히 검찰은 수사과정에서 한화 측이 382개의 차명계좌와 김승연 회장 일가 소유의 13개 차명회사를 통해 1077억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운영한 사실을 밝혀냈다. 따라서 검찰은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비자금의 용처를 철저히 파헤치는 등 보강수사를 통해 법정에서 반드시 유죄를 입증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사정당국 관계자들은 남 지검장의 불명예 퇴진으로 일선 검사들이 잔뜩 독이 올라 있는 만큼 치열한 법리 논쟁을 예고하고 있는 한화 사건에 대한 법정투쟁 과정에서 새로운 뇌관이 폭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경찰 간부와 대기업을 넘어 서서히 정·관계를 향하고 있는 검찰의 2차 사정드라이브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정·관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