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서부지검이 지난해 10월 태광그룹의 불법 상속ㆍ증여 의혹과 관련해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작은 사진은 왼쪽부터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 연합뉴스 |
“검찰에 있으면서 이런 식으로 여러 차례 영장을 기각당한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서부지검)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좋지 않다.”
지난 1월 25일 한화그룹 전·현직 임원 5명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자 서부지검의 한 관계자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검찰은 이들의 신병을 확보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혐의를 집중적으로 파헤친다는 계획을 세웠었지만, 이날 영장마저 기각되자 사실상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다.
한화그룹 수사에서 영장이 기각된 것은 총 다섯 차례다. 지난해 9월 서부지검의 수사가 시작된 이후 한화그룹에 대한 압수수색이 20여 차례, 소환 대상 임직원과 관계자가 300여 명, 소환된 연인원이 800여 명에 이른다. 그룹 총수인 김승연 회장이 소환된 것만 세 차례다. 이처럼 저인망식으로 광범위하게 훑었는데도 다섯 차례나 영장이 기각된 것은 결국 법원이 납득할 만한 증거를 검찰이 찾아내지 못했다는 의미다. 김 회장의 구속도 사실상 물 건너간 분위기다.
한화그룹 수사와 동시에 진행됐던 태광그룹 수사에서는 이호진 회장을 구속하면서 ‘체면치레’는 한 모양새다. 그러나 애초 제기됐던 정·관계 로비 의혹 등에 대해서는 사실상 시작도 하지 못했다. 태광 수사의 경우 초반 거물급 정치인들의 이름이 여럿 거론되면서 한화 수사를 압도하는 파괴력을 보일 것이라는 전망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런 전망과 달리 이 회장 개인비리로 마무리 될 조짐이 보이자 일각에서는 ‘여권 실세의 이름이 흘러나오다보니 개인비리로 방향을 튼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검찰은 수사로 말한다. 이유야 어찌됐든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어떤 비판도 감수해야 한다. 지난 28일 남기춘 지검장이 사의를 표명한 것도 사실상 이렇다 할 성과물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검찰이 한화 태광 등 잇달아 대기업 수사에 착수하던 때만해도 숨죽이며 동향을 살피던 재계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한화그룹 수사의 경우 애초에는 한화 오너 일가의 비자금 조성 의혹에 초점을 맞췄다가 여의치 않자 기업 비리로 방향을 튼 것은 애초의 혐의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나온 증거 등을 이용해 피의자의 또 다른 혐의를 수사하는 전형적인 ‘별건 수사’라는 지적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압수수색을 20여 차례, 소환 인원이 300명에 이를 정도로 수사를 하면 안 걸릴 기업이 어디 있느냐”며 이번 검찰 수사 방식에 불만을 토로했다.
당사자인 한화에서도 이번 수사로 인해 기업 경영에 상당한 차질이 생겼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한화 측은 이미 인수한 푸르덴셜투자증권 및 자산운용과 한화증권 및 한화투신의 합병신청을 금융위원회가 보류했다거나, 예금보험공사가 대한생명 사명 통합 반대로 한화금융네트워크 구축이 지연된 일 등을 경영차질의 대표적 사례들로 꼽고 있다. 한화 측은 또한 장기 수사의 여파로 지난해 8월 중국에서 인수한 한화 솔라원의 주가가 하락해 약 1억 8000만 달러(약 2000억 원)의 손해를 봤고, 미국 태양광개발업체인 리커런트 에너지의 인수에도 실패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태광그룹 역시 이번 수사로 인해 종합편성채널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직·간접적인 피해를 봤다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해석이다. 특히 태광은 유력 사업자로 거론됐음에도 불구하고 쓴 잔을 마셨지만 그 시기가 이호진 회장의 구속 여부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해명도 하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들은 사정기관이 오너를 직접 겨냥할 때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데 이번 수사가 그런 경우”라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기업 활동을 위축시켜 놓고 ‘먼지털이’식 수사로 결과물만 만들어내면 된다’는 식의 수사는 지양했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봉욱 서부지검 차장검사는 지난 1월 26일 브리핑에서 수사 장기화로 기업 경영과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고통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
내상이 아니라 외상?
“이제 저에게도 때가 왔다고 판단해서 정든 고향, 검찰을 떠나려 합니다. (중략) 다만, 그동안 저의 작은 그릇에서 비롯된 편협한 생각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신 여러 분들께는 진심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 남기춘 서부지검장 |
그러나 사실 수사 초기부터 서부지검의 이번 대기업 수사, 특히 한화 비자금 의혹에 대해서는 ‘용두사미론’이 나오는 등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았다(<일요신문> 957호 보도). 서부지검이 화려한 수사팀 진용을 꾸리고 있기는 하지만 대검 중수부가 아닌 서부지검으로 사건이 넘어간 것 자체가 이를 방증한다는 것이다.
당시 검찰 관계자는 “실적 중심의 검찰 시스템에서 만약 실제 큰 건이었으면 대검 중수부에서 수사진을 새롭게 꾸려 수사를 벌이는 게 오히려 더 맞지 않겠느냐”며 “이런 관례를 볼 때 이번 사건에서 비자금이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기존에 알려진 액수와 크게 차이가 나거나 혹은 부풀려졌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서부지검이 대대적인 압수수색과 소환 등을 진행하자 ‘뭔가 있다’는 쪽으로 다시 기울어졌지만 결과는 초라했고 남 지검장은 치명적 ‘내상’을 입었다.
이번 남 지검장의 사퇴를 놓고 외압설이 제기돼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내상이 아니라 ‘외상’이라는 것이다. 남 지검장이 사퇴의사를 밝힌 지난 1월 28일 법무부는 노환균 서울중앙지검장을 대구고검장으로, 차동민 대검 차장을 서울고검장으로 전보하는 등 고검장급 6명에 대한 순환 인사를 단행했다. 한데 원래 이는 계획에 없던 인사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남 지검장의 사퇴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김준규 검찰총장도 이번 인사를 반대했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올 정도다.
대검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청와대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민정수석을 불러 그동안 굵직한 검찰 수사에 대한 보고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상당히 못마땅해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인사가 진행됐다는 것이다. 이 인사에서 남기춘 지검장은 대검 쪽으로 수평이동하기로 돼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존심이 세기로 유명한 남 지검장이 이를 좌천성으로 받아들이며 결국 사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서부지검의 한 관계자는 “한화 수사를 시작한 이후 청와대에서 사사건건 간섭한 것으로 안다”면서 “간섭은 그런 식으로 해놓고 책임은 자기한테 물리는 것에 남 지검장이 불만을 품은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남 지검장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선언하며 검찰을 떠났지만 후유증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