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를 앞두고 경영권 승계 관련 고민에 빠졌다. 오른쪽 뒤는 정의선 부회장.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이로써 현대차는 현대건설 인수로 많은 것을 얻게 됐다. 우선 현대가의 모태인 현대건설을 되찾아 정몽구 회장의 현대가 장자 지위를 확고히 했다. 또한 국내 1위 건설사를 인수하며 보다 사업 영역을 다각화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최근 일각에서는 현대차의 현대건설 인수가 정의선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현대건설 인수를 눈앞에 둔 정몽구 회장의 또 다른 고민을 살펴봤다.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이 피 말리는 현대건설 인수전을 펼치던 지난해 10월 25일, 현대그룹은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현대차그룹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현대그룹은 (현대건설을) 경영권 승계의 도구로 쓰지 않겠습니다’는 광고 카피로 현대차의 경영권 승계 문제를 우회적으로 꼬집은 것이다.
현대그룹이 이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인수전 참여를 부인하던 현대차가 갑자기 뛰어들자 재계에서 ‘현대건설과 현대엠코의 합병을 통해 정의선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실탄 만들기 의도가 숨어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의 건설계열사인 현대엠코는 현재 비상장으로 정의선 부회장이 25.06%, 정몽구 회장 10.0%, 역시 정 부회장이 큰 지분을 가진 물류계열사 글로비스가 24.96%의 지분을 가진 회사다. 만약 현대엠코가 현대건설과의 합병을 통해 상장된다면 정 부회장 등은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다. ‘비상장 기업과 합병하지 않겠다’, ‘시세차익을 노리지 않겠다’는 내용의 현대그룹 광고는 이 점을 파고든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현대그룹의 공격적 광고에 무대응 전략으로 일관하던 현대차 측은 ‘경영권 승계’라는 민감한 문제가 거론되자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 아니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이 광고에 정몽구 회장이 격노했다는 이야기까지 들렸다. 현대차는 이를 잠재우기 위해 ‘현대엠코는 합병하지 않고 공장 건설과 운영에 전문화된 업체로 키우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현대건설을 인수해 건설을 그룹의 3대 주력 사업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청사진도 내놓았다.
이런 현대차의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는 두 회사가 합병할 가능성이 높고 합병을 통해 얻어진 시세차익을 경영권 승계 작업에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재계의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그러나 최근 현대차가 현대건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서 경영권 승계 작업은 오히려 꼬여 버렸다는 관측이 나와 눈길을 끈다. 이런 우려의 목소리는 내부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현재 현대차그룹은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현대차’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 정 부회장이 가지고 있는 지분율은 미미하다. 따라서 정 부회장이 현대차그룹의 경영권을 물려받기 위해서는 계열사 지분 확보라는 지상과제를 안고 있다.
현대차 재무팀의 한 관계자는 “현대건설 인수 자금 5조 1000억 원은 현대차 기아차 모비스 엠코 등 현대차그룹 주요 계열사들이 분담해서 조달할 계획인데 이는 그룹에서 세워 놓은 정의선 부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 로드맵에 여러모로 지장을 주게 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정 부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각 계열사가 여러 측면에서 부담해야 할 몫이 있는데 한꺼번에 많은 현금성 자산이 빠져 나가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라고 설명하며 “일단 현대건설 인수가 최우선과제이기 때문에 차질이 생긴 부분에 대해서 당장 어떻게 해야겠다는 대응책은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쌓아둔 현금들이 모두 경영권 승계에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문제는 지난해 ‘도요타 대규모 리콜 사태’ 이후 완성차 업체에 불고 있는 유동성 자금 확보 열풍과도 맞물려 있다. 즉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한 푼이 아쉬운 마당에 5조 원이라는 거금이 인수전에 사용되는 것은 현금 유동성에 연쇄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셈이다.
현대차그룹 내부 사정에 밝은 재계 관계자는 “현대차의 현금창출력이 1년에 4조 원가량임을 고려하면 인수전에 들어간 돈은 만회가 되겠지만 재무구조가 정상화되는 시간이 그만큼 미뤄질 것이고, 이에 따라 경영권 승계 로드맵도 수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기업평가도 지난 1월 18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현대차 컨소시엄의 풍부한 현금유동성을 고려하면 현대건설 인수에 따른 재무부담 요인은 제한적”이라면서도 “대규모 현금성자산 보유가 중요한 완성차 업체 특성상 현금 유동성 감소는 부담”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현대건설 인수가 정의선 부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 작업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종전의 예상과는 달리 현대차는 또 다른 묘수 짜내기에 머리를 싸매야 할 형편이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
‘3% 군살 빼라’ 진땀
지난 19일부터 현대차그룹은 현대건설 계동 사옥에 TF팀을 파견해 인수가 조정 등을 위한 본격적인 실사작업에 돌입했다. 현대그룹과의 치열한 인수전으로 인해 입찰가가 예상가보다 훨씬 올라간 상황에서 TF팀은 한 푼이라도 인수가를 낮추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시장에서는 현대건설의 적정가가 4조 5000억 원 안팎일 것으로 예상했으나 입찰가는 이보다 훨씬 높았다. 현대차가 써 낸 금액은 5조 1000억 원. 때문에 현대차는 이번 실사를 통해 인수 가격을 낮추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대차와 채권단은 현대차가 입찰 당시 제시한 5조 1000억 원에서 실사 결과에 따라 ±3% 범위에서 조정할 수 있도록 합의한 바 있다. 5조 1000억 원의 3%는 약 1600억 원이다.
현대차 실사단 관계자에 따르면 실사단은 현재 이 금액을 깎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여기에 대한 경영진의 압박이 거센 것으로 알려졌다. 실사 작업은 약 4주간 이어질 예정이며 현대건설 채권단과 현대차는 늦어도 3월 중에는 본계약을 체결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