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C 드라마 <역전의 여왕>의 한 장면. |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타인을 위해서 굳이 귀찮은 일은 하지 않는 게 그들의 특징이다.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더라도 직접적인 원인 제공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떳떳하다. 홍보기획사에 근무하는 D 씨(여·32)는 같은 부서 여자 대리 때문에 밤새 헛일한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고객사에 회사소개서 일부를 수정 후 보내야 했습니다. 해당 파일을 관리하는 대리한테 받았지만 일이 밀려 집에서 작업해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퇴근했는데 수정이 안 되지 뭡니까. 고가의 변환 프로그램이 필요했던 거예요. 밤새 끙끙거리며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봐도 해결이 안 되더군요. 결국 다음날 일찍 고객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부랴부랴 팀장한테 사정을 얘기하니까 변환 프로그램이 그 대리한테 있다는 겁니다. 회사 파일 유출 규정 때문이라는데, 여러 설명이 귀찮았던 것 같더군요. 제가 잘 몰랐던 탓도 있지만 다 알면서도 ‘어머 그래요? 외부에 보낼 때는 무조건 그 파일이어야 해서요’라며 생글거리는데 어이가 없더군요.”
디자인 회사에 근무하는 K 씨(여·29) 역시 옆자리 동료 때문에 본의 아니게 단체 활동에 일부러 빠진 얌체족으로 몰렸다. 시간이 한참 흘러서야 직원들이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던 이유를 알게 됐단다.
“연말에 전체 직원이 1박2일로 단합대회를 가게 됐어요. 하지만 저는 여름에 일이 몰려서 휴가를 갈 수가 없었고 12월이 지나 해가 바뀌면 아예 쓸 수 없기 때문에 뒤늦게 따로 휴가를 갔습니다. 이런 사정은 옆자리 동료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다른 부서 직원들이나 윗분들이 왜 제가 안 보이냐고 물어보자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로 일관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제가 단합대회를 가기 싫어 일부러 휴가 일정을 잡은 것으로 보였겠죠. 따져 물으니 ‘그저 일일이 답하는 것이 귀찮고 왜 다른 사람을 위해 변호를 해야 하느냐’고 되묻더군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오고가는 정이 있고 서로 챙겨주기도 해야 동료애가 생기는 법이다. 매사 손해는 보지 않겠다는 모습이 곱게 보일 리 없다. 의류회사에 근무하는 C 씨(여·34)도 같은 회사에 얄미운 직원이 한 명 있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이 아쉬울 때는 지체 없이 달려와서 도움을 요청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부탁을 좀 하면 바쁘다고 절대 도와주지 않는 직원이 있어요. 그 직원 소속 팀에 사은품도 많이 들어옵니다. 솔직히 회사 전체로 들어온 사은품이지 개인에게 온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절대 다른 직원들한테 나눠주는 법이 없어요. 사은품을 줄 때는 딱 하나의 경우, 제작 부서에서 그 직원한테 옷을 줄 때뿐이에요. 자신이 받았으니 하나 준다 이거죠. 매사에 네가 하나 주면 나도 하나 준다는 식의 태도 때문에 다들 잘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 편입니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S 씨(31)도 다들 싫어하는 여자 동기가 한 명 있다고 이야기했다. 수더분한 구석이 없고 늘 자기 생각만 한다는 것이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점심을 먹으러 가면 보통 각자 밥값을 내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그냥 오늘은 내가 사고 다음엔 또 얻어먹은 다른 누군가 사고 그러잖아요. 그 동기는 절대 그런 게 없어요. 항상 ‘N분의 1’(전체가격÷사람 수)이에요. 한 번은 밥을 먹고 제가 현금이 모자라서 그 동기한테 2000원을 빌렸어요. 들어가서 주겠다고 했죠. 그런데 일하다 보니 깜빡해서 퇴근 무렵이 된 겁니다. 갑자기 사내 메신저로 쪽지가 와서 보니 그 동기가 계좌번호를 보내면서 그날 안으로 2000원을 통장으로 넣어달라고 하더군요.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싶더군요. 그러다 어느 날은 거꾸로 그 동기가 저에게 5000원을 빌렸어요. 복수할 기회다 싶어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쪽지 날렸습니다.”
회사에서 편하고 쉬운 일만 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때로 하기 싫고 어려운 일도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잔머리’를 굴려 힘든 일을 교묘하게 떠넘기는 사람들이 있다. 광고기획사에 근무하는 E 씨(여·33)는 후배가 꼭 그렇다고 하소연을 했다. 못 당할 정도로 머리를 굴려서 결국 본인이 일을 떠맡게 된다고.
“회식 자리에 가서도 일부러 나가기 어려운 구석자리에 제일 먼저 골라 앉아요. 보통 막내들은 문가에 앉아서 이런저런 심부름도 하잖아요. 자리가 그러니 자기 동기들은 열심히 들락날락하는데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만히 앉아 있는 스타일이에요. 고기 한 번 뒤집는 법이 없어요. 갈 때도 조용히 사라지고 젤 윗사람인 부장한테만 슬쩍 얘기를 해서 야단도 못 치게 만들죠. 공동 프로젝트를 할 때도 가장 쉬운 것만 해놓고 그냥 잠적이에요. 연락을 하다 하다 안돼서 남은 어려운 일을 제가 다 떠맡아야 했죠. 사무실에서 뭐라 좀 하려 하면 부장한테 아프다고 하곤 전화기 꺼놓고 쉬었다고 그래요. 아주 교묘하고도 이기적으로 머리 쓰는 타입이라 정이 안 가는 후배입니다.”
보험 업계의 G 씨(30)도 힘든 일만 쏙쏙 피해가는 선배 때문에 짜증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란다. 때로는 머리 쓰는 게 빤히 보여 따지고 싶을 때도 많단다.
“보험이 청구되면 전자 팩스로 들어오는데요, 하기가 싫거나 한꺼번에 여러 건이 청구되면 다른 사람한테 가도록 다시 접수하고 팩스로 보내더군요. 팩스에는 시간하고 날짜, 발신번호까지 찍혀 다 알 수 있는데 나름 머리를 쓴다고 하면서 그렇게 일을 떠넘기더라고요. ‘복잡한 건은 나만 안 걸리면 된다’는 식이에요. 한번은 고객이 환자복 입고 법무사까지 대동하고 사무실에 찾아왔어요.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제가 뭘 알겠습니까. 당황하면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데도 그 사수는 한참을 쳐다보기만 하더군요.”
직장생활 30년을 넘긴 한 전문경영인은 “직장에서 자기 일만 잘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각자 ‘업무+알파’를 해야 전체 조직이 잘 돌아가고 그런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면서 “요즘 젊은이들이 이를 잘 모르는 듯하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배려’가 조직생활의 기본이라는 것이 ‘이기적 유전자’들에게 주는 선배들의 진심어린 충고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