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장공비에서 목사로 그리고 이제는 안보 교육가로 제3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는 김신조 씨.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43년 전 이 아비규환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28명 사살, 1명 북한 도주, 1명 체포) 한국군에 체포됐던 김신조 씨. 체포 후 전향해 한국인으로서, 목사로서 ‘제2의 삶’을 꾸려왔던 그가 이제 칠순의 나이에 ‘제3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지난 1월 26일 김 목사를 만나 그가 준비하고 있는 제3의 인생 및 북한사회 전반에 대한 제반 궁금증을 들어봤다.
―43년 전에 남한으로 넘어왔는데.
▲난 배고파 넘어온 탈북자가 아니고 43년 전 남한 공산화를 위해서 넘어왔다 귀순한 것이다. 총정찰국 일원으로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 대통령을 죽이고 혁명시켜라’라는 지령을 받았다. 만약 그때 내가 임무를 성공시켰다며 이 나라는 이미 공산화가 됐을 것이다. 모두 31명이 넘어왔지만 29명은 살상됐고, 한 명은 살아서 다시 북한으로 넘어가 지금은 북한의 고위 장군이 됐다. 난 당시 체포돼 귀순한 것이다.
―침투 당시 상황을 회고한다면.
▲박정희 대통령을 죽이고 남산 KBS를 점거해 미국 제국주의자를 몰아내기 위해 남한 인민들이 원해서 우리가 침투했다는 내용의 방송을 할 예정이었다. 남한 침투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다. 6·25와 이번 연평도 사건을 “남한이 규정을 먼저 위반해서 북한이 응징했다”고 발표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다음에는 미 대사관, 육군본부, 수용소 순으로 습격할 계획이었다.
―정찰총국 훈련과정은 어땠나.
▲정찰총국은 정예부대 중 최정예다. 북한에서 가장 강한 게릴라 특공대로 훈련 강도가 엄청나다. 한 시간에 12㎞를 도보로 이동한다. 그것도 30㎏의 장비를 지고 말이다. 그밖에 태권도, 건물다리 파괴, 공중에서 투하, 쾌속 잠수정 타고 작전 수행, 침입 폭파 연습도 한다. 내가 넘어온 다음에 120명 특공대 공비가 침투했는데 동해안 무장공비 침투 사건, 천안함·연평도 사건 등도 모두 총정찰국 소행으로 보고 있다. 총정찰국은 내가 있었을 때는 10만 명이었으나 현재 20만 명으로 수를 늘렸다. 그만큼 북한이 남한 도발을 단단히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체포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삶을 꾸렸나.
▲70년 4월 7일 자유의 몸이 됐고, 정부 보조금 한푼 받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고 남한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나에게 편지를 보내던 여인과 결혼해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뒀고 모두 바르게 컸다. 사위도 목사다.
―남한 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68년 일명 ‘김신조 사건’의 책임을 혼자 짊어져야 하는 게 힘들었다. 당시 내가 소지하고 있던 총알, 수류탄 등을 단 한 발도 사용하지 않았던 점이 인정돼 ‘살해 혐의’ 자체가 없었지만, 혼자 살아남았기에 다 짊어져야 했다. 그 사건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난 죄책감이 들었다. 희생자 가족에게는 아직까지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더불어 우리들 때문에 후에 군복무가 연장되고 특수 유격 훈련 등이 도입돼 당시 한국 남자들이 많이 힘들어졌다. 물론 나 때문에 한국의 국방력이 더 공고해졌지만(웃음)….
―최근에 한나라당이 제안한 북한 인권위원회 고문 자리를 수락한 배경은.
▲목회를 하면서도 북한이 나의 고향이고 형제다 보니 항상 북한 동포들에 대해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북한 인민들이 자유를 맛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는 것이 기본이고, 다음이 의식주 문제이고, 그 다음이 군사 문제인데 이것이 순차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근본적인 북한 주민들의 ‘자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군사, 통일 문제도 해결이 안된다. 그래서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이런 결심으로 70세로 목사직을 은퇴하는 시점에 북한 인권위 고문직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한나라당이 아닌 다른 당에서 제안을 했어도 수락했을 것인가.
▲그렇다. 다른 당이라고 해도 비슷한 제의를 받았다면 수락했을 것이다. 통일은 정치와 당을 떠나서 이뤄져야 하는 문제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말로는 북한 주민들을 도와야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생색내기에 바빠 정작 인권 보호는 소홀하다. 식량을 보내야 하느니 마느니에 대해서만 얘기할 뿐 무엇이 우선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 같아 답답하다.
―외국에서도 북한 인권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미국 등 다른 나라 의회에서 북한 인권문제 관련 법률이 모두 통과됐다. 이런 상황에서 정작 당사자인 우리나라만 이 문제에 무심한 것이다. 우리가 먼저 나서서 법을 통과시키고 세계에 호소해도 모자랄 판인데 순서가 바뀌었다.
―북한은 현재 식량 문제가 심각한 상황인데도 최근 북한 지도부가 김정일 위원장의 생일을 맞아 군량미 10만 톤을 강제징수한다고 밝혔다. 왜 이런 조치를 했다고 보는가.
▲북한 체제 특성상 무리해서라도 군량미를 징수하려하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 체제를 잘 알아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북한 지도부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군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군부지원이 없다면 김정일 부자가 삼대 독재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북한 인민들이 배를 곯아도 이보다는 군부의 의식주 문제가 우선이다.
―한국 정부의 북한 지원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있나.
▲남한이 지원을 한다면 과연 그것이 북한 주민들을 도와주는 것인가 아니면 북한 정권을 더욱 공고하게 해주는 것이냐를 잘 판단해야 할 것이다. 6·15 공동성명 이후 경제면에서 많은 지원이 있었다. 식량과 비료 등을 풍족하게 지원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북한 인민들에게 얼마만큼 돌아갔나. 10년 동안 남한에서 보내준 것은 다 김정일 창고로 들어갔다. 이 당시 무력도발 안하겠다는 각서를 썼는데, 지원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북한은 핵 미사일을 발사했다. 천안함 사건, 연평도 사건 모두 이 일환에서 생긴 사건이다. 우리는 순수하게 협상을 믿고 지원을 해줬지만 결과는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그럼 우리 정부는 어떻게 북한을 대해야 한다고 보나.
▲정부는 확고하고 단호한 입장을 고수할 필요가 있다. ‘남한 공산화의 위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원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북한 정권의 최대 이상은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의 공산화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협상이 이뤄질 수 있겠나. 국제적 효력이 있는 남한 도발 불가능 각서를 받은 후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게 맞다.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통일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해 북한의 페이스대로 끌려가선 안되고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
―최근 안보 교육을 위한 연설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제 ‘제3의 인생’은 우리나라 젊은 세대에게 안보 교육을 시키는 데 쓰고 싶다. 최근 25사단에 국방 교육을 갔었는데 젊은이들이 훌륭했지만 ‘정체성’이 희박했고, 왜 입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북한과 남한의 긴장이 극대화되던 60년대를 거치지 않은 세대들은 통일과 북한에 무감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우리와 반대로 북한 군인들은 ‘절박함’이 있다. 이에 지지 않으려면 우리도 정신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그래서 시민 단체와 군부대를 돌며 강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미 기자 wihtsm@ilyo.co.kr
“정착금? 난 맨발로 뛰었어”
기자를 맞이한 김신조 목사의 얼굴은 ‘평온’ 그 자체였다. 70대의 노익장의 여유로움은 남양주 풍광만큼이나 넉넉했다. 북한 무장공비에서 목사로 그리고 이제는 안보 교육가로서 제3의 인생을 준비하는 그의 인생 속 여유로움을 궁금해 하는 기자에게 김 목사는 자신의 70년 인생 이야기를 풀어놨다.
그의 고향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기로 이름난 함경북도 청진시. 그는 총정찰국 시절 ‘혁명’을 위해 부모도 북에 남기고, 아름다운 풍광도 뒤로한 채 남한에 넘어왔다. 죽을 각오로 넘어왔지만 사건 당일 그는 차마 남한 동포를 죽일 순 없었다. 체포되기까지 탄약과 수류탄을 한 발도 쓰지 않았다. 이런 점이 참작이 돼 그는 체포 후 전향 권고를 받았다. 김 목사는 “당시 흔하던 고문 한 번 받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게 대해주는 남한 정부의 태도에서 ‘자유=남한’이라는 사실에 감동받아 전향을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그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됐다.
그는 “박정희 정권 때는 나의 사례가 좋은 본보기가 됐다. 반공 사상을 고양시키기는 데 말이다”라며 “이런 유명세 때문에 팬들이 생겨났는데 지금 나의 와이프도 팬 중의 한 명”이라고 웃음지었다. 더불어 그는 “우리 집사람이 나에게 편지를 계속 보내왔다. 지금 말로 말하면 연애 결혼을 한 것”이라며 “정부 중매를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물론 그의 남한에서의 정착과 사랑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처가의 반대가 극심했다. 하지만 아내의 강한 의지 덕에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 1970년 10월 7일, 양택식 당시 서울시장이 주례를 섰다. 그것이 벌써 41년 전 얘기다. 큰딸이 40세가 됐으니 말이다. 큰딸은 목사에게 시집가서 송탄에서 남편의 목회일을 돕고 있다고 한다. 38세인 작은아들은, 숙명여대 성악과 출신으로 음악을 전공하는 예쁜 며느리와 결혼했다.
하지만 김 목사가 남한에서 이런 삶을 일궈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는 “국민들이 내가 정부 혜택을 많이 받았는 줄 아는데 사실이 아니다. 68년 1월 21일 체포돼 전향을 해 사회에 나오면서 정부에서 돈을 받은 것은 없다. 그때 한국 법에는 정착금이 없었다. 1970년 4월 7일 사회 나와서 정릉에서 하숙을 했고, 결혼해서는 전세를 살았다”고 털어놨다.
가난하고 어려운 삶에 곱지 않은 눈초리도 그를 힘들게 했다. 김 목사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김신조 씨’라는 질문 속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김 목사는 ‘나는 은총받은 사람’이라며 담담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하루 24시간을 48시간처럼 썼다. 절반 자고 절반 먹고 남들 놀 때 난 공부하고 일했다. 오늘날의 나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정부가 도와줬다면 나는 떳떳하다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난 스스로 자랑스럽다.” 자신있게 말하는 김 목사 표정을 보고 기자는 그의 첫 인상에서 느꼈던 여유로움의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