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청와대에서 만난 정몽구 현대차 회장, 구본무 LG 회장, 이건희 삼성 회장(왼쪽부터). (왼쪽 네모)강신호 회장 | ||
재계의 시선이 온통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 쏠려있다. 그가 내년 초 재계의 대표 모임인 전경련의 신임 회장직을 과연 받아들일까에 관한 관심 때문이다.
전경련 회장 타이틀은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전경련의 자체 파워가 예전보다 약해지면서, 그룹 오너들 사이에서 ‘폭탄 돌리기’ 수준으로만 인식돼왔다.
이 회장 역시 번번이 후보 ‘1순위’로 지목됐으나 아직까지 전경련 회장직을 맡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큰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올해 이 회장이 지목된 상황이 예년과 조금 다르다. 일부에서는 “이 회장이 이번에는 전경련을 직접 챙길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돌 정도다.
그가 회장직은 정중히 고사한 것이 지난 4년 동안 세 번째. 지난 2000년 김각중 경방 회장, 2002년 손길승 SK그룹 회장, 2003년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을 동안 그는 늘 전경련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왜 재계에서 올해는 특별하다고 하는 것일까. 얘기는 지난달 전경련 정기 모임에서 시작된다.
지난달 25일 강신호 전경련 회장은 공식석상에서 “내년 2월에 전경련의 새 회장을 추대해야 한다”며 “통솔력이 있고 정보와 아이디어가 풍부한 이건희 회장이 그 자리를 맡아줬으면 한다”고 말한 것.
전경련 관계자가 공식석상에서 차기 전경련 후보자의 이름을 콕 찍어 지목한 것이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더욱이 현재 회장을 맡고 있는 강 회장이 그의 이름을 거론했으니 그 의미가 남다르다.
전경련이 그동안 ‘재계의 실질적 리더’, ‘파워있는 오너’ 등 우회적인 표현으로 이 회장에게 ‘러브콜’을 보내기는 했지만, 직접 실명을 거론하자 재계는 적잖이 놀란 분위기다.
특히 강 회장은 “빅3 그룹에서 전경련 회장이 나오는 것이 좋겠다”고 전제한 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회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고,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대외적으로 말하는 것을 꺼려한다고 하더라”며 나머지 ‘빅 3’ 회장을 은근슬쩍 배제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재계에서는 ‘강 회장의 이건희 회장 추대 발언’을 두고 얘기가 오가고 있다. 강 회장이 섣불리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일부에서는 벌써부터 ‘삼성측과 어느 정도 조율이 끝났다’, ‘전경련의 본격적 설득 작업이 시작된다’는 등의 추측이 무성하다.
물론 이 추측이 맞을 것인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으나, 전경련의 요즘 일련의 활동이 ‘예년 같지 않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전경련 관계자는 “현재 경제가 처한 상황과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할 때 이건희 회장이 가장 적임자라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전경련이 이토록 이 회장에 목을 매는 이유는 추락된 전경련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이 회장만한 적격자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실제로 그동안 전경련은 오랜 공백 기간에 휩싸여 있었다. 지난 1998년 고 SK그룹 최종현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은 이후로 강력한 구심점을 찾지 못했던 것이 사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의욕적으로 바통을 이어받았으나, 그는 야심을 채 펴기도 전에 물러나야했다.
‘최고 연장자’ 김각중 경방그룹 회장이 전경련을 이끌 때에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급기야 ‘오너’들의 공식 모임에 ‘비오너’인 손길승 SK그룹 회장이 나서기까지 했다.
이 상황에서 만약 이건희 회장이 전경련을 맡는다면 무려 8년 만에 4대 그룹의 오너가 전면에 나서는 것이 된다.
전경련이 이 회장에 강력한 ‘러브콜’을 보내는 또다른 이유는 그의 건강과 관련해서다.
삼성은 그동안 이 회장이 전경련 회장 후보로 지목될 때마다 ‘건강 회복’을 이유로 들어 거절을 하곤 했다.
그는 지난 1999년 10월 미국에서 폐암 치료를 받았다.
당시 삼성은 “건강상태로 인해 전경련 회장을 맡기 어렵다”며 “향후 5년 동안은 건강에만 신경을 써야할 것으로 보인다”고 못 박은 것.
그러나 삼성의 이 ‘5년 발언’은 그를 오히려 옭아매는 명분을 주고 말았다. 올해가 바로 삼성이 주장한 ‘5년’째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삼성은 “이 회장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5년 정도가 걸린다고 얘기한 것일 뿐, 이후에 전경련을 맡겠다는 뜻은 아니다”며 “현재 그룹이 처한 상황으로 미뤄볼 때 전경련을 맡기 어렵다”고 말했다.
전경련의 ‘적극적 구애’에도 불구하고 ‘NO’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삼성그룹의 이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그룹들의 시각은 좀 다르다. 이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할 가능성들이 농후하다는 시각이다.
그 중 그간 시중에 떠돌던 건강 염려설에 대한 불식 차원에서 ‘암’과 관련된 각종 루머에 정면으로 맞설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는 것.
그런가하면 삼성과 정부의 ‘이견’을 좁히는 데에도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는 시각도 있다. 만일 이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을 경우, 최근 이슈로 떠오른 공정거래법 개정 움직임 등 예민한 사항에 대해 정부와 직접 토론에 나설 수 있지 않겠느나는 기대다.
특히 삼성그룹이 향후 이 회장의 외아들인 이재용 체제를 무난히 계승하기 위한 정지작업으로 전경련 회장직을 맡는 것이 무난하지 않겠느냐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