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작업의 정석>의 한 장면. |
내숭 떠는 동료 때문에 졸지에 ‘거친 여자’가 되었다는 N 씨(28). 그녀는 얼마 전 그 동료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 가구 관련 회사에 근무하는 N 씨는 평소에 같은 사무실에 있는 동료 때문에 스트레스를 적지 않게 받아온 편이라 스스로도 그 비밀이 놀라웠다.
“제가 특별히 남성스러운 건 아니에요. 그저 편한 옷을 즐겨 입는 것뿐이고요. 그런데 동료가 워낙 여성스럽게 하고 다니니까 비교가 되는 거죠. 거의 매일 하늘하늘한 원피스만 입는 편이고, 말투도 얌전합니다. 처음에는 그냥 농담처럼 가볍게 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스트레스가 됐어요. ‘너도 좀 저렇게 해봐라’ 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비교를 당하면 누구라도 짜증이 나지 않겠어요. 그러다 어느 날 화장실에 갔는데 담배연기가 나기에 봤더니 낯익은 슬리퍼가 보이지 뭡니까. 워낙 공주 같은 동료라 슬리퍼도 공주풍의 특이한 제품으로 단번에 알아봤죠. 평소에 다른 직원들이 담배를 피우면 ‘아이, 담배 냄새 싫어요’라면서 도망가던 동료인지라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N 씨는 그 이후로 동료의 모든 행동이 가식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섬유업체에 근무하는 K 씨(여·29)도 N 씨의 경우와 비슷하다. 지금 생각해도 얄미운 그 직원은 남들 앞에서만 천사이고 자신과 단 둘이 있을 때는 백팔십도 변하는 스타일이었다.
“제가 원래 ‘내숭과’한테 너그러운 편이 아니에요. 직설적인 말투라 바로바로 실수나 거짓말 같은 거 사람들 앞에서 지적하고 그랬죠. 한번은 저랑 단 둘이 있을 때 싸움을 걸더군요. 수많은 사람들을 겪었지만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을 좋아했다나요? 그러면서 저한테 너 같은 사람 끔찍하고 1분 1초도 같이 있기 싫다는 둥 막말을 해요. 그러는데 점심 먹고 다른 직원들이 들어왔어요. 이제 저랑 그 직원이 식사를 하러 가는 순번이었죠. 방금 전까지 그렇게 싸워놓고 사람들이 들어오니까 상냥하게 ‘식사하러 안 가실래요?’ 하고 물어보더라고요. 누가 방금 싸운 사람이랑 밥 먹고 싶겠어요. 그냥 대답 안 하고 모른 척했더니 다른 직원들이 오히려 저를 이상하게 쳐다봐요.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후로 K 씨는 회사에서 졸지에 차갑고 무뚝뚝한 사람이 됐다. ‘내숭과’ 동료 때문에 힘든 일을 떠맡았다고 하소연하는 직장인들도 있다. 금융업종의 L 씨(28)는 여자 동기 때문에 부서회식 자리만 가면 고역이다. 술을 못 마시는 척하는 동기 때문에 상사들이 주는 술을 대신 다 받고 있단다.
“목소리도 부드럽고 하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보기에는 술이라고는 한 방울도 입에 못 대게 생기긴 했어요. 그래서 입사 후 회식 자리에서 그 동기가 술 못 마신다고 했을 때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죠. 회식이 있을 때마다 ‘동기사랑’이라면서 동기한테 가는 술을 다 제가 마셔야 합니다. 신입이라고 가뜩이나 저 혼자 받는 술도 많은데 그걸 두 배로 마셔야 하니 죽겠습니다. 얄미운 건 사실 그 동기가 술을 못 마시는 게 아니란 거죠. 동기들끼리 있을 때는 꽤 마신다니까요. 이런 걸 말해도 아무도 안 믿으니 저만 죽는 거죠.”
L 씨는 따로 동기한테 이야기해 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당연한 건데 문제 삼는다고 핀잔만 들었단다. 그 뒤로는 그냥 꾹 참고 도움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속상한 건 C 씨(여·26)도 마찬가지다. 자신도 여자지만 같은 여자인 동기가 워낙 내숭을 떨어서 졸지에 어렵고 힘든 일은 다 제 차지가 됐다고 한다.
“입사했을 때부터 유난을 좀 떨더라고요. 진짜 새끼손가락 손톱만 한 벌레가 나왔는데 호들갑도 그런 호들갑이 없었어요. 그때부터 곱지는 않았는데 무슨 어려운 업무가 내려오면 무조건 못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상사도 엄한 편이 아니고 우유부단해서 바로 저한테 옵니다. 다 제몫이 되는 거죠. 무역회사라 다 같이 제품 옮길 때도 꼭 빠져요. 치마 입고 구두 신었다고 하면서요. 하는 시늉이라고 하면 좋은데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저랑 둘이 있을 때 하는 말이 어차피 일 잘한다고 인정받고 싶은 생각 없고 결혼할 때까지만 직장생활 할 거라서 되도록 편하게 있고 싶다나요? 마치 그 동기가 공주고 제가 시녀가 된 느낌이에요.”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동료들끼리 야한 농담이 오고가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내숭녀들은 손사래를 치며 듣지 않거나 별천지 세계인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마케팅 회사에 근무하는 H 씨(여·29)는 얼마 전 클럽에 갔다가 사무실에서 소문난 내숭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항상 정갈한 정장만 입고 다니고 마치 기숙사 사감 선생님 같은 말투로 도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말투를 하면 지적하곤 하는 스타일이에요. 내숭이다, 원래 그런 성격이다 하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이번 목격담으로 싹 정리됐네요. 평소에는 요조숙녀 같은 옷차림과 말투만 하고 다니던 사람이 클럽에서 ‘부비부비’를 하고 있지 뭐예요. 아주 능숙하게 추더라니까요. 친구들하고 놀러갔다가 그 동료 구경하느라고 전 제대로 놀지도 못했어요. 저희 일행이 나올 때도 여전히 놀고 있던데 복장도 야해서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요.”
식품회사에 근무하는 P 씨(30)도 회사에 비슷한 동료가 있다고 말했다. 평소에 남자 직원들끼리 야동(야한 동영상)이나 야겜(야한 게임) 이야기를 하면 짐승 같다고 경멸하던 여자 동료의 비밀을 보고 말았단다.
“다른 여직원들은 그냥 핀잔이나 주면서 지나가거나 얘기에 참여하거나 그래요. 근데 그 동료는 정말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보거나 전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보곤 했죠. 그러다 어느 날 급하게 필요한 서류가 있어서 요청하려고 했더니 자리에 없는 거예요. 원래 다른 사람 컴퓨터 함부로 만지고 그러지 않는데 하도 급해서 그 동료 컴퓨터를 봤는데 서류가 어디 있는지 도통 모르겠는 겁니다. 바탕화면에 서류라는 폴더가 있기에 이거다 싶어 봤더니 온통 야설(야한 소설)이었습니다. 여자들이 야설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렇게 경멸의 눈빛으로 보던 동료가 야설 마니아였다니, 다 내숭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네요.”
원만한 직장생활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내숭은 필요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적당한’의 기준이 참 어렵다. 기준 이하면 너무 편하게만 대하고 이상이면 자칫 가식으로 비칠 수 있다. ‘현명한 내숭과’가 되는 길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것이 바로 직장생활이 아닐까.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