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검장급 인사 등 악재 속에서 김준규 총장이 대대적인 사정작업을 준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사진은 합성. |
지난달 27일 단행된 고검장급 인사에서 ‘물 먹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김 총장이 조직 내에서의 흔들리는 입지를 다지기 위해 강도 높은 사정 드라이브를 걸었다는 것이다. 최근 ‘위기의 남자’로 불리는 김 총장이 선보일 ‘히든카드’는 무엇일까.
“장비는 쓰러지고 제갈량은 떠나는 형국.” 김준규 검찰총장이 고검장급 인사가 마무리된 후 지난 1월 31일 대검찰청 고위 간부들과의 회의에서 내뱉은 말이다. 여기서 장비는 한화·태광 그룹 수사를 이끌다 돌연 사의를 표명한 남기춘 전 서부지검장을, 제갈량은 김 총장을 1년 6개월 동안 보좌하다 서울고검장으로 발령 난 차동민 전 대검 차장을 빗댄 것으로 전해진다. 둘 다 김 총장이 아끼는 최측근들이다. 특히 차동민 전 차장의 경우 김 총장이 끝까지 인사를 반대했지만 청와대가 강행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김 총장이 비유를 섞어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을 놓고 검찰 내에선 이번 인사를 향한 불만을 토로했을 것이란 관측이 파다하다. 실제로 김 총장은 인사가 발표되자 이례적으로 오후 세 시에 검찰 청사에서 퇴근하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다. 김 총장이 발언할 당시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중수부 관계자는 “분위기가 일시에 가라앉았다. (총장이) 할 말은 많은 듯했으나 침묵으로 대신했다. 나를 포함한 중수부 고위 간부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이번 인사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청와대와 김 총장 간 불협화음은 어느 정도 예견된 바다. 김 총장이 지난해 의욕적으로 진두지휘했던 대기업 수사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역효과가 날 조짐을 보이자 올해 초부터 여권 내에선 김 총장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이 불거졌다. ‘출구전략’을 모색하려는 청와대에 맞서 김 총장이 ‘몽니’를 부리고 있다는 소문도 들렸다. 김 총장 뜻을 사실상 무시한 고검장급 인사가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에 대해 법조계 및 정치권 일각에서 ‘당연한 결과’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대기업 수사 실패, 고검장급 인사 등 악재가 계속되자 검찰 내에선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김 총장이 ‘식물 총장’으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그러나 김 총장은 측근들에게 수사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며 ‘흔들리지 말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수도권 지역 특수부장 회의를 주관해 사회지도층 및 토착 비리에 대해 강한 대응을 부르짖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앞서의 중수부 관계자는 “빠르면 2월 말 본격적인 사정에 착수해 김 총장 임기가 끝나기 전인 7월경 기소를 마무리 지을 것이다. 총장이 물러나기 전에 한 건 하는 게 후배들의 도리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일단 검찰은 그동안 해오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대기업과 제2금융권, 역외탈세, 토착비리, 정치권 게이트 등 새로운 사건을 시작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입수된 첩보들을 바탕으로 내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지난해 말부터 제2금융권 부실을 조사 중인 금융당국, 역외탈세를 파헤치고 있는 국세청 등으로부터 상당한 양의 자료를 받았다고 한다. 여기엔 내로라하는 국내 저축은행과 대기업이 포함돼 있어 적지 않은 파장이 일 전망이다. 또한 전·현 정권에서 이뤄졌던 M&A 중 의혹이 무성했던 일부를 골라 전문가들과 함께 검증에 들어간 상태다. 검찰은 ‘용두사미’로 평가받은 지난해 대기업 수사를 교훈으로 삼아 확실한 물증 확보를 수사진행의 첫 번째 원칙으로 삼았다.
김 총장은 정·재계를 포함한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토착 비리 척결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일선에선 그동안 ‘변죽’만 울리고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던 정치권을 벼르는 검사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여의도는 검찰발 사정광풍에 바짝 엎드린 모습도 엿보인다. 또한 검찰은 유력 집안 2·3세 자제들의 도덕적 해이를 파헤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이를 위해 다른 사정기관에게 관련 자료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와 관련, 검찰은 얼마 전 한 대기업 2세 경영인이 마약을 복용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확인 작업에 나섰다.
김 총장이 진두지휘하는 이번 사정은 검찰의 최정예부대 중수부가 최전선에 나설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C&그룹 수사로 ‘박연차 게이트’ 이후 1년 만에 기지개를 켰지만 자존심을 구겼던 중수부로선 ‘명예회복’에 나서는 셈이다. 김 총장 역시 자신의 직속부대인 중수부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한다. 중수부의 또 다른 관계자는 “C&그룹 수사가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며 정치권으로의 수사 확대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어 그 관계자는 “중수부에 걸맞은 정치권 연루 게이트 사건을 주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수부 뒤를 받치는 곳은 일선지검들이다. 김 총장이 지난해 정·재계 수사를 앞두고 임명했던 지검장들 중 남기춘 전 서부지검장을 제외하곤 모두가 건재한 상황이다. 더군다나 동·서·남·북부지검의 19기 ‘특수통’ 차장검사들이 올해 검사장 승진 후보군이어서 수사 열기는 뜨거울 것으로 보인다. 검찰 안팎에선 일선지검들이 ‘함바 게이트’에 연루된 정치인들과 이익단체의 ‘정치인 후원금’ 등을 수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역시 김 총장에게 힘을 실어줄 가능성이 크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검찰 내에서도 특수수사를 잘하는 검사들이 많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지만 그동안 김 총장의 신임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환균 전 지검장과의 ‘불편한’ 사이 때문이라는 게 많은 검찰 인사들의 공통된 설명이었는데, 지검장이 교체된 상황에서 김 총장이 특수부를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여권 내에선 이러한 검찰 움직임에 대해 근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무리한 수사’라는 비난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검의 한 관계자는 “우리가 잘못한 부분이 많았던 것을 인정한다. 또 지금이 위기라는 것도 맞는 말”이라면서도 “오히려 그래서 지금 총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최고 엘리트 집단이라는 자부심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지난해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