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월 18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 구제역 가축 매몰지 사후관리 대책을 점검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구제역 파동은 불가항력적 전염병에서 침출수 오염 등 환경문제로 비화돼 생활정치 영역으로 옮겨 붙고 있다. 민심이 요동칠 가능성이 커지는 대목이다. 서민물가를 잡기 위해 드디어 ‘유류세 인하’라는 특단의 카드도 꺼내들 조짐이다. 저축은행 파동 대책도 곧 발표될 예정이다. 그동안 민심악화에 꿈쩍도 하지 않던 청와대가 선제적 대응조치로 돌아서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청와대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배경에는 4월 재·보궐 선거에 대한 위기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정운찬 전 총리 등 거물급 인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나섰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도 여러 경로를 통해 협조 요청을 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청와대의 민심관리에 비상등이 켜진 내막을 따라가 봤다.
지난 2월 중반까지만 해도 청와대의 기류는 강경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4년차를 맞아 각종 언론에서 물가급등과 전세대란, 구제역 파동 등을 언급하며 민심악화 대책을 세우라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참모들은 청와대 자료를 언급하며 물가나 전셋값 파동이 대통령 지지율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건전한 상식을 가진 다수 국민은 물가나 전세값 급등의 직접책임이 대통령에 있다고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당시 청와대 정무라인은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심각한 상황도 아닌데 야당이 정치공세를 심하게 펴고 있다”라며 방어막을 쳤다. ‘바닥민심 급랭’을 우려하는 여당과는 현격한 인식 차이가 있었다. 공개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지 않는 보수 지지층의 지지율이 30~40%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유선전화로 여론조사를 실시해 응답률이 10%대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현재의 민심과 5% 이상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바닥민심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청와대의 ‘지지율 인식’에 대해 여당에서는 한목소리로 우려를 나타냈다. 한 재선 의원은 “청와대에는 대통령 지지율을 들먹이며 ‘상황 인식의 차이’와 ‘편협한 사고’를 가진 참모들만 넘칠 뿐 단 한 명도 직언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한 사람만 있어도 이렇게까지 민심과 따로 노는 일방적 생각이 지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참모들의 이러한 인식과 기류는 이 대통령의 ‘색안경론’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2월 20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산행에서 “세상은 내가 어떤 안경을 꼈느냐에 따라 세상을 그렇게 본다고 본다. (중략) 각자가 안경을 벗고 세상을 보면 우리가 같은 세상을 볼 수 있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사실 바로 가는 세상인데 색안경을 끼고 보니 비뚤게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이는 이 대통령이 안경을 벗고 보는 세상만 옳은 것이기 때문에 야권을 향해서도 색안경을 벗으라는 요구와 다를 바 없다. 최근 야권 등에서 구제역 파동, 고물가, 전세대란 등을 ‘트집 잡는’ 것도 색안경을 끼고 보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것일 뿐이라는 얘기로도 들린다.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대통령의 색안경 발언을 듣고 내심 상당히 걱정스러웠다. 국민들이 색안경을 벗을 수 있도록 노력도 하지 않고 무작정 벗으라고 요구하는 것 아니겠느냐. 민심을 이렇게 무시하는가 싶어서 두렵기도 했다. 이 대통령이 이런 마인드를 가진 이상 다음 총선·대선은 해보나 마나다”라고 우려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청와대가 악화일로에 있는 민심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비록 청와대 내부 관계자의 공개적 발언은 아니지만 초기 청와대의 핵심이었던 박형준 사회특보가 악화된 민심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는 최근 청와대 관련 인사로는 처음으로 “구제역 전세난 물가와 관련해 민심이 상당히 안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사실이다. 여기에다 집권 4년차 정부의 국정관리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국민들이 정권에 기대했던 욕구 중 충족되지 못한 불만이 표출되고 이런 과정에서 정권에 대한 반감이 확산돼 좋지 않은 민심이 퍼질 가능성이 있다. 지역발전 욕구가 정치권과 결합돼 지역주의도 강해진다”라며 민심악화를 공개 인정한 바 있다.
사실 청와대는 구제역 고물가 등은 하나같이 당장 해결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에 민심악화라는 야당의 공세에 대해 별 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단기 처방전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문제와 얽힌 이슈마저도 ‘생활정치’ 영역으로 옮겨오면서 청와대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먼저 구제역 파동은 봄이 되면서 진정국면으로 들어서 큰 걱정을 더는 듯했다. 하지만 전국에 4000곳이 넘는 구제역 매몰지에서 침출수가 유출되며 지하수 등을 오염시키는 2차 환경피해가 커지면서 민심이 악화되고 있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급하게 묻은 나머지 매몰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경우가 많다. 뒤늦게 매몰지 담당공무원의 실명제 실시를 통해 후유증을 줄이려고 하지만 이미 침출수는 지하수로 스며들었고 2차 오염은 불가피하게 됐다. 지역주민들이 식수를 걱정할 정도라면 문제가 심각한 것 아니겠느냐. 야당에서 매몰지 국정조사를 추진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특히 이명박 정권의 위기관리 능력이 수준이하라는 점에서 보수층의 여론도 상당히 좋지 않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중동사태로 고유가가 지속되면서 서민물가가 빠르게 폭등하고 있는 점도 악재다. 여권은 고물가가 심각하다고 보고 유류세 인하라는 마지막 카드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다. 서민물가 폭등으로 민심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130달러 정도 됐을 때 유류세 인하를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서민물가가 매우 빠른 속도로 오르고 있는 점을 감안해 그 전 시점에서 인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부산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저축은행에 대한 불신도 민심악화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부산에는 저축은행에 대한 대량 인출사태가 날마다 일어나고 있다. 그 여파가 일반은행까지 퍼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국제금융위기와 부동산 거품의 후유증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민심악화를 우려한 정부는 조만간 ‘저축은행 종합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여기에 전세대란은 정부의 대책 발표에도 전혀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전세대란의 주 대응 부서 수장인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이 지난 2007년 12월에 분양받은 13억 3000만 원짜리 주상복합 아파트를 최근 5억 원에 전세 놓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불타는 민심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개별 사안마다 민심악화와 직결되는 쪽으로 상황이 악화되면서 청와대도 민심관리에 적극 나서고 있다. 청와대가 뒤늦게 민심관리에 나선 배경에는 역시 이 대통령의 레임덕과 연결된 선거 때문이다. 현재 여당 내부에서는 “4월 재·보궐 선거에서 분당 하나만 건지면 본전”이라는 패배의식이 팽배해 있다. 이에 청와대는 정운찬 전 총리, 김태호 전 경남지사 등 거물급을 영입해 재보선 패배의 둑을 막아보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라는 지적이 많다(박스 기사 참조).
또한 청와대는 이번에야말로 박근혜 전 대표의 협조를 강하게 원하고 있다. 청와대는 안상수 대표를 통해 박 전 대표의 협조를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안 대표는 “박 전 대표가 여러 가지로 깊이 생각해본다고 했다. 어떤 형태로든 선거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라며 조바심을 내고 있다.
재보선을 지휘하는 여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이에 대해 “청와대가 여러 경로를 통해 박 전 대표에게 강력하게 재보선 협조 요청을 한 것으로 안다. 이번 재보선은 지난해 8월 이명박-박근혜 회동의 효과가 나타날지 알 수 있는 가늠자가 될 것이다. 박 전 대표도 민심악화와 재보선의 중요성을 알고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주변의 많은 참모들이 위험성을 경고하며 만류하고 있다고 한다. 박 전 대표가 민심악화와 맞물려 정권심판 성격이 짙어지고 있는 이번 재보선을 못 본 체할 경우 이 대통령의 차기 보장에 대한 생각도 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박 전 대표의 선택이 주목된다”라고 말했다.
어찌 보면 ‘민심’이라는 말만큼 불명확한 정치용어도 없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지지율도 높은 데다 극도의 민심 이반 징후도 없는데 언론과 야당이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다며 볼멘소리다. 하지만 정치는 심리이자 분위기다. “아무 것도 아닌데 왜들 이러느냐”는 식으로 대응하다가 역대 대통령들은 그 하찮은 민심에 떠밀려 역사의 뒷문으로 쓸쓸하게 퇴장했기 때문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청와대가 자충수 두고 있다’
한나라당에 4·27 재·보궐 선거에 대한 위기감이 깊어지고 있다. 이번 선거는 구제역파동, 전세대란 등의 와중에 치러진다는 점에서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심판이란 의미가 어느 정도 작동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청와대 위주의 일방적 선거 주도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전략도 맞지 않고 거론되는 후보도 패배를 자초하는 자충수가 될 것이라는 경고음도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이에 대해 “당 중심으로 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청와대가 너무 나서고 있다. 문제는 선거 전략이다. 지역 일꾼을 후보로 뽑아 재보선을 최대한 정책중심 선거로 끌고 가야 하는데 무조건 이기려는 욕심에 정운찬 등 거물급을 투입해 선거가 오히려 정권심판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 구제역 파동, 전세대란 등 악재가 많은데 정권의 상징적 인물인 정운찬 전 총리나 김태호 전 지사 등이 나서게 되면 바로 심판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도대체 선거를 제대로 치러본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 의심스럽다”라고 말했다(여당 일각에서는 정 전 총리 영입은 이명박 대통령의 뜻이었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엄기영 강원지사 예비후보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MBC 사장 시절 정권에 의해 쫓겨난다는 인상을 심어줘 야당색이 깊게 밴 엄 후보를 영입한 것을 두고 “현 정권의 원칙 없는 인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최악의 사례”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엄 후보의 정치행보에 대해서 일단 말들이 많다. 출마 발표를 하면서 국회를 택하지 않고 한나라당 강원도당을 택해 ‘배신자’라는 부정적 여론을 일단 피하려 했다는 것이다. “강원도는 한나라당이 필요하다”는 출사표에 대해서도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밝히지 않고 여당에 편승해 이겨보려는 얄팍한 꼼수”라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 내부 의견도 엄 후보에 대해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서울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엄 후보는 오랫동안의 뉴스 앵커로 다져진 지적인 이미지가 장점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끊임없는 구애를 받는 등 야당 이미지가 강했던 인사를 굳이 영입한 까닭을 모르겠다. 정치에서 배신자라는 비판은 가장 큰 오명이다. 초반 여론조사에서 앞섰지만 갈수록 격차가 좁혀지는 것도 배신자라는 데 대한 여론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엄 후보 영입은 이번 재보선 전략의 최대 실수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청와대의 전략 판단 미스에도 여당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의 일방적인 주도를 제어할 당의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안상수 대표는 지난 ‘정동기 항명 파동’ 이후 청와대의 왕따 때문에 식물대표로 전락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니 당의 청와대 예속 현상은 더 깊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