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물가억제 대책으로 정유사 통신사에 대한 가격인하 압박이 이어지면서 SK그룹이 몸살을 앓고 있다. 사진은 최태원 회장. |
지난 2월 14일 SK텔레콤은 기본료가 2만 원대로 저렴한 청소년 전용 스마트폰 요금제를 선보인 데 이어 16일에는 SK이노베이션(옛 SK에너지)이 서민층이 주로 사용하는 난방유 판매가격을 리터당 50원 인하했다. 이에 앞서 지난 1월 31일에는 SK가스가 2월 액화석유가스(LPG) 공급가격을 동결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SK그룹 측은 통신료와 기름값 일부를 인하하면서 “정부의 물가 안정 대책에 기여하는 방안”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SK그룹의 이 같은 대책은 정부가 최근 물가 억제 대책의 일환으로 정유사와 통신사에 대한 가격인하 요구를 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실제로 지난 2월 9일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통신 3사가 지난해 3조 6000억 원의 이익을 냈고, 정유사는 3분기만 해서 2조 3000억 원의 이익을 냈다. 소비자로부터 귀착된 이익인데, 유통구조 개선 등을 통해 가격 인하 요인이 충분하다고 판단한다”며 정유·통신사에 직접적인 가격인하를 요구했다.
비단 윤 장관의 이날 발언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통신요금과 기름값 인하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표적 가격인하 품목인 정유와 통신은 공교롭게도 SK그룹을 떠받치고 있는 두 핵심 사업군이다. 국내 대기업 중 정유와 통신사업을 함께 영위하고 있는 곳도 SK가 유일하다. 때문에 물가가 급격히 오를 때마다 SK는 여론 악화뿐만 아니라 정부의 눈치까지 살펴야 하는 상황이다.
사실 SK도 통신요금과 기름값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름값의 경우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 일각에서는 정부가 세금을 먼저 내려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게 일고 있다. 통신요금 또한 임의로 조정할 경우 후발 사업자의 존립이 흔들릴 수 있어 SK 혼자서만 요금을 내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SK가 볼멘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SK의 주력 사업에 대한 현 정부의 시각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정유 통신 사업은 과거 정부가 독점으로 운영하다 SK가 사실상 특혜성으로 넘겨받은 것 아니냐”며 “정부의 힘을 입어 성장한 기업이니 만큼 경제가 어려울 때 더 적극적으로 정부를 도와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도 지난 연말 사석에서 “SK가 공공재인 전파를 사용해 사적인 이익을 지나치게 챙기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정부 관계자들의 이러한 발언은 SK 주력 사업에 대한 현 정부의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SK그룹 수익 구조를 당장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최태원 SK 회장의 가장 큰 고민이다. 최 회장은 몇 해 전부터 해외시장 진출을 통한 수익 구조 변화를 꾀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예를 들어 대표 계열사인 SK텔레콤의 경우 미국 중국 베트남 등 꾸준히 해외시장의 문을 두드려 왔다. 중국 시장의 경우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미국 베트남 등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미국 시장의 경우 ‘힐리오’라는 브랜드를 론칭하며 통신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사업을 접어야 했고 오히려 구설수만 남겼다.
아이폰을 무기로 한 KT의 약진으로 국내 통신 시장의 상황도 여의치 않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한때 황제주로 불렸던 SK텔레콤의 주가가 10년째 제자리걸음을 보이는 것이 SK의 현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에너지 분야 역시 각국 정부의 규제가 심한 데다 초기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사업이어서 글로벌화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재계에 불었던 대기업 사정 바람도 SK그룹의 운신의 폭을 좁게 한다. SK 역시 사정 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먼저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이 지난해 11월 SK텔레콤에 대한 전격 세무조사에 나섰다. SK는 정기 세무조사라고 해명했지만 조사4국이 나서서 하청업체 등에 대한 조사까지 동시에 벌인 것을 보면 특별조사의 성격이 강하다는 게 재계의 관측이다. 세무조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어서 SK가 이를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한 술 더 떠 검찰의 사정 리스트에도 SK가 꾸준히 오르내렸다. 검찰은 지난해 10월경 한화그룹 태광그룹 C&그룹 등 잇따른 대기업 수사에 나선 바 있다. 당시 검찰 주변에서는 ‘이 기업들이 끝나면 다음은 ○○그룹이다’라는 식으로 몇몇 기업이 거론된 바 있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SK와 관련한 각종 소문들이 검찰 주변에 무성했다. 오너 일가가 직접 거론된 것도 많았다. 모두 소문에 불과하더라도 관련 내용이 검찰에 고스란히 보고된 만큼 SK그룹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 없다. 또한 검찰도 관련 정보들이 잇달아 보고되면 이를 마냥 소문으로만 치부하기도 어렵다.
한편 지난 1일 공정거래위원회는 SK텔레콤 KT 등 국내 음원업체들이 음원 상품 종류 및 가격을 담합했다며 총 과징금 188억 원을 부과했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시정조치와 함께 주요 음원업체 대표이사들을 검찰에 고발했는데 이도 통신료 인하 압박과 무관치 않다는 관측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검찰 국세청 공정위, 사정기관의 상황들 역시 고스란히 파악하고 있는 SK가 아무리 대내외 기업환경이 어렵다 해도 정부의 압박에 이렇다 할 불만을 표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가격인하 압박과 수익구조 고착화 외에도 비금융 지주사의 금융 자회사 소유를 금지하는 현 공정거래법상 SK증권 소유 문제, 사촌 최신원 SKC 회장 형제와의 계열분리 등 최태원 회장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굵직한 현안은 많다. 잡히지 않는 물가처럼 최 회장의 시름도 쉽사리 풀리지 않을 듯하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