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두 가지 발언에 대한 윤증현 장관의 반응을 놓고 여러 추측이 오가고 있다. |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최근 보이는 행보를 놓고 정부 부처 공무원들은 윤 장관의 생각을 읽어내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윤 장관은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낙제점은 면했다”는 발언에 대해서는 강한 톤으로 비판을 한 반면 이 회장이 강력하게 비난한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서는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윤 장관의 이러한 태도는 청와대의 흐름과는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청와대는 이 회장의 낙제점 관련 발언에는 강한 불쾌감을 표시하는 데 반해 초과이익공유제에는 이렇다 할 가이드라인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의 낙제점 관련 발언은 그동안 한국 경제 성장을 이끌어왔다는 자부심이 강한 경제 관료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점에서 윤 장관의 강력한 반발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이 회장은 지난 10일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회의에 앞서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에 “참 어려운 질문이다. 그래도 계속 성장해 왔으니까 낙제 점수는 아니겠죠. 과거 10년에 비해서는 상당한 성장을 했다고 본다”고 답했다. 다시 ‘흡족하다는 것이냐’는 질문이 나오자 “흡족하다기보다는 낙제는 아닌 것 같다”고 답했다.
이 이야기가 전해지자 청와대는 물론 정부 부처는 상당히 격앙됐다. 당장 청와대는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경제 수장인 윤 장관도 강력하게 비난했다.
윤 장관은 지난 14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참석해 “전대미문의 세계경제 위기를 맞아 이 정도로 글로벌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전 국민의 합일 노력이 있었으나 정부의 역할도 상당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석학들이나 언론 국제기구 등에서도 한국 정부의 신속하고 과감한 정책이 위기탈출에 큰 바탕이 됐다고 다 인정했다”면서 “이런 정부 정책의 지원을 받았던 유수한 대기업 총수가 낙제점수 운운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프다. 이런 인식을 어찌 가졌는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일갈했다.
한국은 세계 경제사에서 정부의 계획경제 개발모델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대표되는 계획경제 모델을 내세워 경제 발전을 주도해왔다. 비록 중간에 외환위기라는 큰 실책이 있었지만 그 외에는 성공신화를 걸어왔다. 특히 이번 글로벌 경제위기를 넘기면서 경제 관료들은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때 입은 트라우마(외상성 스트레스장애)도 상당부분 회복한 상태다.
정부 관계자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회복에 대해 세계 언론들이 교과서적인 경제회복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장하준 영국 캠브리지대 교수도 여러 저서에서 신흥국의 경우 정부가 계획을 통해 경제개발을 이루는 한국식 발전모델의 효과를 언급할 정도”라면서 “게다가 대기업 사장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대기업들이 마음껏 운신할 수 있도록 규제개혁에 앞장서 왔다. 그런 상황에서 낙제점은 면할 정도라는 평가가 과연 타당한 것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윤 장관을 중심으로 공직사회의 반발이 거세지자 삼성은 지난 16일 사장단회의를 통해 공식 해명을 내놓으며 진화에 나섰다. 이처럼 이 회장의 낙제점 관련 발언에 대해서는 청와대와 보조를 맞췄던 윤 장관이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서는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윤 장관은 14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회의에서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이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묻자 “어떻게 정의하고 공유할 것인지 기술적인 문제가 있지만, 전체적인 취지는 살려야 한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라며 초과이익공유제에 힘을 실었다. 윤 장관은 특히 ‘시장경제 원리에 반하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 “앞으로 공론화 과정에서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면서 “일단은 동반성장위원회가 추진하는 내용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초과이익공유제란 기업이 거둔 초과이익의 배분 대상을 주주나 임직원에 한정하지 않고, 생산과정에서 초과이익을 낼 수 있도록 기여한 중소기업도 포함시키자는 개념이다. 즉 대기업이 거둔 초과이익 중 일부를 생산에 기여한 하도급업체에 나눠주자는 것이다. 초과이익공유제는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내놓은 개념이지만 이에 대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등 재계의 반발에 직면해있다. 청와대 일각에서도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부정적인 기류가 감지된다.
정부의 핵심 경제 관료인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이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더 이상 이야기 안 했으면 좋겠다”며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이 이러한 기류를 반영한다. 이 때문에 윤 장관이 자신의 길을 가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반면 청와대가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나타내지 않고 있어 ‘딴 목소리 내기’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오히려 초과이익공유제 논란으로 그동안 청와대가 강조해온 대중소기업 상생 자체가 어그러질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윤 장관이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 정운찬 위원장이 당장 최중경 장관의 발언에 대해 “지경부 장관으로서 그러한 얘기를 한 것은 이 정부의 동반성장 의지가 있는지 의심이 들게 만든다. 보고 받고 경악했다”며 강하게 반발하는 등 사태가 악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김동선 중소기업청장이 윤 장관과 같은 톤의 목소리를 낸 것도 윤 장관의 구원투수론 해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김 청장은 지난 15일 한국경영연구원 강연에서 “이념적인 문제를 떠나서 (초과이익공유제의) 기본적 취지에 많은 공감을 한다. 현재 대기업이 가진 경쟁력은 그 기업만의 경쟁력이라기보다는 성과를 내는 협력업체들 힘이 보태진 것으로 봐야 한다”며 “이익이 나면 그 혜택은 대기업과 협력업체 등 참여한 모든 주체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재정부의 한 당국자는 “윤 장관의 발언은 초과이익공유제 그 자체보다는 그 제도가 품고 있는 대중소기업 상생의 취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며 “현재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상생 논의를 제 자리로 돌려놓으려는 행보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김서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