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값 점심을 다오 물가가 치솟자 ‘맛있는 점심’보다 ‘싼 점심’을 찾는 샐러리맨들이 많아졌다. 사진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직장인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출근 준비하느라 정신없는 아침 시간에 도시락까지 싸려니 솔직히 성가시지만 월급의 10%에 육박하는 점심 비용을 생각하면 저절로 싸게 돼요.”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A 씨(여·27)는 지난해 말부터 회사에 도시락을 싸간다. 갈수록 점심값이 올라서 같은 팀 여직원들끼리 의견을 모았다. 각자 밥이랑 반찬 한 가지씩만 가져오기로 했다. 몇 명이 모이니 제법 그럴싸해서 뷔페 같기도 하단다.
“반찬 하나라 긴 고민 없이 도시락을 싸긴 하지만 다 같이 나눠먹으니 매일 같은 반찬을 싸갈 수는 없어요. 매번 성의 없이 도시락을 싸오는 선배는 얄미워요. 거의 같은, 그것도 인기 없는 반찬만 가져옵니다. 저도 귀찮지만 다른 사람 생각해서 대부분이 좋아할 만한 음식으로 준비하게 되거든요. 점심값 아끼려면 어쩔 수 없고 뒤에서만 흉보는 거죠.”
동료들과 합심해서 저렴하게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건 도시락만 있는 게 아니다. 원단회사에서 일하는 C 씨(여·33)의 사무실에서는 매달 초에 식비를 걷는다. 한 끼에 5000원씩 계산해서 한 달 치를 미리 준비하고 그에 맞춰 메뉴를 정한다고.
“한꺼번에 대량으로 주문하니까 싸게 먹을 수 있는 것도 있고요, 일단 식비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까 그에 맞춰서 절약하게 돼요. 매번 메뉴 정하는 건 고역입니다. 너무 비싼 것도 안 되고 그렇다고 싼 것만 먹을 수도 없어요. 가끔 직원들이 맛있는 것 좀 먹자고 하면 다소 과한 메뉴를 정하기도 해요. 그런 경우가 많으면 월말에는 꼭 김밥 한 줄로 때워야 하는 날이 있습니다. 그래도 먹고 싶은 음식을 배불리 먹는 ‘스페셜 데이’도 있어야 다른 직원들의 불만이 없습니다.”
사무실 직원들의 협조를 구하는 게 어려운 직장인들은 홀로 점심을 먹는 방법으로 점심값을 절약한다. 자동차 부품 관련 업체에 근무하는 K 씨(29)는 동료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을 때도 있지만, 회사에서 좀 떨어진 편의점을 이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끔 궁색하다고 느낄 때도 있어요. 하지만 편의점을 이용하면 식비가 확 줄어드는 게 눈으로 보입니다. 살 뺀다는 핑계로 운동한다고 나와서 편의점에 가곤합니다. 요새는 편의점 도시락도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더라고요. 4000원 이하로 종류도 다양하고 기대한 것 이상으로 맛도 괜찮아요. 편의점에 가보면 저 말고도 점심을 그렇게 간단하게 때우는 직장인들이 꽤 많습니다.”
편의점에서 사먹는 것마저도 아깝고 회사에서 집이 멀지 않다면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IT 서비스 회사에 다니는 L 씨(여·28)는 집이 지방이라 부득이하게 회사 근처에 방을 얻었다. 교통비라도 절약해 볼 심산이었다. 월세가 나가다보니 매년 오르는 밥값 부담이 해마다 커져 점심값을 아낄 방법을 모색했고 궁리 끝에 ‘집’을 선택했다.
“계속 어디 가야 싸게 먹을 수 있을까만 고민했는데 생각해보니 굳이 사먹을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걸어서 5분 정도만 가면 되거든요. 가자마자 미리 해둔 밥에 냉장고에서 반찬만 꺼내서 간단하게 해결하고 한숨 돌리고 회사로 옵니다. 직원들하고 같이 점심시간에 수다도 떨고 사적인 친분도 쌓는 재미는 아무래도 없어요. 같이 밥 먹고 산책하면서 쌓는 정도 꽤 크잖아요. 하지만 동료들도 집에 가서 먹고 오는 저를 이해해줘요. 인근 식당 점심값이 워낙 많이 올라서 일부 직원들은 집이 가까운 저를 부러워하기도 하고요.”
근처 ‘남의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이들도 적잖다. 서울 홍익대학교 인근 디자인 업체에서 일하는 H 씨(여·37)는 점심때가 다가오면 2명의 팀원과 자주 이용하는 곳이 있다.
“점심값이 오르면서 구내식당 있는 회사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더라고요. 인근에는 저렴한 분식집도 별로 없고, 백반을 파는 식당은 가면 늘 만원이에요. 카페 같은 인테리어에 밥값이 비싼 가게가 대부분이죠. 멀리 갈 수도 없고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밥값을 쓰다가 어느 날 한 직원이 대학 내 학생식당으로 가보자고 하더라고요. 바글거리는 학생들 틈에 섞여서 갔는데 가격도 2000원 대로 굉장히 저렴했습니다. 거의 일반 식당의 3분의 1 수준 가격이라 좋다고 들어갔죠. 신분이라도 물을까봐 조마조마하긴 했는데 우려했던 일은 없었어요. 솔직히 가격이 싼 만큼 양질의 식사를 할 순 없었습니다. 그래도 카드대금 낼 날이 다가오면 학생식당을 이용하는 횟수가 많아질 수밖에 없더라고요.”
회사 비용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직장인도 있다. 유통회사 홍보팀에 근무하는 J 씨(34)는 점심때가 다가오면 접대할 대상을 물색한다. 미리 외부인사와 약속을 하거나 별다른 약속이 없을 때는 기자실에 내려가 자리에 있는 기자와 함께 식사를 한다.
“다른 회사들도 그렇듯 접대의 의미가 있는 모든 지출은 회사에서 비용처리가 됩니다. 접대할 사람들과 돈독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식사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사심도 있습니다. 접대를 겸하는 점심은 메뉴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저까지 덩달아 맛있는 걸로 마음껏 고를 수 있어요. 접대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제가 먹은 것까지 비용처리가 되죠. 요즘같이 밥값이 비싸지면 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직장생활 20년이 다 돼가는 설비회사 D 부장(48)은 거의 매일 똑같은 점심이 지겹지만 꾹 참고 있다. 그는 “회사 앞을 조금만 벗어나도 점심값이 6000원을 훌쩍 넘는다”며 “5000원대인 해장국이 그나마 저렴해 자주 갈 수밖에 없다”고 푸념했다. 식재료 값이 오르자마자 식당의 메뉴 가격도 무섭게 올랐다. ‘반값 등록금’뿐만 아니라 ‘반값 점심값’도 외쳐야 하는 시대가 오는 게 아닐까.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