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국세청이 지난해 8월 이현동 청장 취임 이후 ‘역외탈세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이 자금의 실체가 드러날지 주목된다. 국세청은 이외에 대기업 페이퍼컴퍼니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칼을 들이댈 전망이어서 그간 ‘무풍지대’로만 여겨졌던 유력 인사들과 대기업의 해외 비자금이 실체를 드러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역외탈세 근절’은 이현동 국세청장이 차장으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입버릇처럼 해왔던 말이다. 이 청장은 이를 위해 전담팀까지 꾸리는 등 해외로 빠져나가는 세수를 막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논란이 있지만 성과도 적지 않았다. 국세청은 지난 4월 ‘선박왕’ 권혁 시도상선 회장에 대해 4000억 원 규모의 추징금을 부과했다. 5월에는 ‘구리왕’ 차용규 씨에 대한 과세방침을 밝히고 세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역외탈세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에 새삼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는 정치인들과 대기업 오너 일가의 해외 비자금과 관련한 소문만 무성했을 뿐, 실체가 드러난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현재 국세청은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 등 일부 조세피난처와 조세 협약을 통해 관련 자료를 넘겨받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최근 스위스 국세청이 배당금 58억 원을 환급한 일에 언론의 관심이 모아지는 것 역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지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지난해 스위스에 있는 금융기관을 통해 한국 증권 시장에 유입된 자금의 총규모는 4조 원 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 내부에서는 이 자금 중 상당 부분이 대기업 오너 일가들이 불법으로 조성한 자금이거나 불법 유출된 정치자금일 것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현재 국세청이 다른 나라 국세청과 맺은 조약에 따르면 해외를 통한 우회적인 투자의 경우는 해당국에도 세금을 내야 한다. 숨길 이유가 없는 돈이라면 굳이 더 많은 세금을 내고서 우회 투자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투자 금액은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나간 불법 반출 금액으로, 탈세 자금일 가능성이 높다”며 “스위스에 숨겨놓은 ‘검은 자금’의 일부가 국내 주식시장에 투자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국세청이 역외탈세와 관련한 ‘꺼리’들을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상황에서 이번 스위스 환급금으로 드러난 자금은 좋은 타깃이다. 국세청은 당장 이 자금의 출처와 성격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런 국세청의 의지처럼 조사가 순조롭게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투자자와 투자 대상의 구체적인 사항은 스위스 정부에서 철저히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세청은 한국과 스위스가 맺은 조세협약을 개정하는 방법을 통해서라도 이 자금의 ‘소스’를 찾아내겠다는 입장이다.
국세청은 또 다른 조세피난처로 알려진 홍콩에 근거를 둔 기업들의 비자금을 찾는 작업도 벌이고 있다. 최근에는 이를 위해 역외탈세와 관련한 태스크포스(TF)팀을 극비리에 홍콩에 보내 몇몇 대기업들의 역외탈세 여부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세청 내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국세청이 총 5명으로 구성된 TF팀을 홍콩에 보내 대기업들의 해외비자금에 대한 현지 조사에 착수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들은 금감원을 통해 국내 은행들로부터 관련 자료를 넘겨받아 분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조사를 진행했다”며 “여기에는 K 그룹 계열사와 S 그룹 계열사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탰다.
정·재계에서는 스위스나 홍콩에 묻혀 있는 해외 비자금에 대한 국세청의 조사가 순조롭게 이뤄져 그 내용이 공개될 경우 파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과연 국외로까지 뻗어나간 검은 돈의 사슬을 이 기회에 끊어낼 수 있을까.
박혁진 기자 phj@ilyo.co.kr
미실처럼…측근 힘 빼기?
삼성 내부 관계자들은 이번 감사 기능 강화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을 내놓고 있다. 하나는 고 이병철 창업주 때부터 지켜온 ‘청렴 경영’ 기조가 최근 들어 많이 무뎌졌다고 이 회장이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삼성 계열사의 한 임원은 “회장님이 특검으로 인해 잠시 물러나 있는 동안 비리에 무감각해졌던 것이 사실”이라며 “영속적인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제품 자체의 질뿐만 아니라 조직문화가 깨끗해져야 한다는 것이 회장님의 생각인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해석은 이번 감사 기능 강화를 후계구도 작업과 맞물려 바라보는 것. 이와 관련해 삼성 계열사의 또 다른 관계자는 임원진의 대대적인 교체를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선덕여왕>에 빗대어 표현했다. 그는 “미실(고현정 분)이 측근으로부터 신라의 인사안을 받아 실행한 뒤 해당 인사들을 모두 숙청했다. 이는 측근의 힘을 빼기 위해서였다”면서 “이번에 사표를 낸 인물들 중 상당수가 지난 연말 인사에서 눈에 띄는 약진을 했던 사람들이라 드라마 내용이 연상된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이 인사들에 대해) 지난 연말 인사에서 이 회장이 제동을 걸지 않은 것도 그들의 추이를 지켜보기 위한 것 아니겠냐”고 추측하면서 “이번 감사 기능 강화를 후계구도와 맞물려서 바라보는 것이 삼성 내부의 대체적인 시각”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관측에 대해 재계 한 관계자는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재용 사장의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이 회장의 노림수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돌연 ‘청렴 경영’이란 화두를 삼성에 던진 이 회장의 진짜 의도에 삼성 그룹뿐만 아니라 재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