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환 대표는 천안 사옥 집무실에 딸려 있는 연구실에서 틈틈이 ‘미래 에너지 응용 기술’을 구상한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전북 고창 농가에서 12남매의 열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지주 소리 들을 정도로 땅이 많았죠. 근데 제가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인감을 맡겼던 지인이 땅을 팔고 도망가면서 하루 한 끼도 못 먹을 정도로 졸지에 알거지가 됐어요. 이후 형과 누나들은 입에 풀칠하기 위해 모두 도회지로 나가고, 저는 손재주가 좀 좋아서 중·고등학교까진 예능특기 장학생으로 다녔습니다.”
1985년 겨울, 고교 졸업이 다가오자 그는 혼자 힘으로 국내 최고 수준의 미술대학에 가겠다면서 상경한다. 그러나 시험을 보면서 그는 벽에 부딪혔다. 실기시험 4시간이 주어졌는데 자신만 빼고 다 1시간 만에 과제를 완성했다는 것. 입시미술을 연마한 이들과 경쟁이 될 리가 없었다. 수치스러움에 그는 1시간 만에 시험장을 뛰쳐나와 누나가 있던 인천 수출공단으로 향했다.
“1년여 동안 공장 밑바닥에서 일했는데, 단순노동을 하면서도 가만있지 않고 자꾸 뭔가 만드니까 개발실에 넣어주더군요. 거기서 지식이 모자란 걸 느끼고 공장 근처 전문대에 다니며 밤새 책 보고 실험했죠. 이후 지식을 활용할 수 있을 법한 산업용 모터 보호 장치 회사로 옮겼어요. 그런데 단조로운 프레스 일만 시키는 거예요. 3개월을 일하고 나서 공장장 면담을 신청해 기술개발 쪽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창고로 가래요. 가보니 불량품이 산더미인데 부장 한 분이 매일 두세 개씩 고치고 있었어요. 제가 일주일 만에 창고에 있는 걸 다 고쳐버렸더니 회사가 뒤집어졌고 바로 연구소로 차출됐습니다.”
연구소 시절 주경야독하며 서울과학기술대학교(옛 서울산업대학교)에 편입, 1992년 졸업한 그에게 입대영장이 날아왔다. 군복무 동안에도 기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끊이지 않았다. 상병 때부터 전공서적 두 권을 끼고 살면서 제대 무렵엔 무려 100번이나 독파한 것. 책갈피가 닳는 만큼 그의 가슴엔 꿈과 자신감이 자라났다고 한다. 연구소 핵심인재로 복귀해 일하던 그에게 또 하나의 전기가 다가왔다. 1996년 초 주말 아르바이트로 산업용 충전기를 만드는 동양시스템에 기술개발을 해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개발비를 받아야 할 즈음 그 회사가 부도가 나고 말았던 것.
“시장성이 있는데 너무 아까운 거예요. 기술도 다 내 거고. 그래서 지인 2명과 함께 직원 두세 명인 그 회사를 인수해 동양기술연구소, 즉 동양기연이라고 이름을 바꿨죠. 1997년 말쯤 외부에서 우리 회사를 도와주던 이승용 현 부사장으로부터 ‘일본에서 리튬이온 배터리가 상용화됐는데 보호회로(PCM) 국산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도전해보자’ 맘먹고 연구를 시작했지요. 산고 끝에 시제품을 들고 관련 회사에 찾아갔는데 반응이 너무 좋은 거예요. 이듬해 모토로라 배터리 보호회로를 일본 배터리회사에 공급하게 됐고 1999년 모토로라 공식 OEM업체로 선정됐죠.”
모토로라의 힘은 컸다. 1998년 22억 원에 불과했던 매출액이 1999년 100억 원을 넘긴 것. 이후 기술력과 가격에 매료된 배터리 제조회사들의 주문이 줄을 이었고 2000년 코스닥에 상장까지 할 수 있었다. 2001년 회사 이름을 넥스콘테크놀러지로 바꾸고 2002년엔 노트북과 의료기기, 스마트폰 배터리에 쓰이는 스마트 모듈(SM)을 개발, 시장의 호평을 받았다. 탄탄대로를 달리는 듯했던 그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친 것은 2005년. 적대적 M&A(인수·합병)의 회오리가 몰아친 것이다.
“창업할 때부터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저는 기술개발해서 좋은 제품을 생산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2005년까진 경영은 생각도 안 했죠. 그런데 미국 출장 다녀오니 덜커덩 적대적 M&A가 들어온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지했죠. 당시 우리 자산가치만 해도 340억 원대였는데 우리 경영진 지분율이 15%밖에 안됐어요. 15%+1주, 그때 주가로 100억 원만 들이면 경영권을 가져갈 수 있었으니 상대 회사는 보물찾기를 한 셈이죠.”
김 대표는 부랴부랴 경영권 방어를 지휘해줄 CEO를 영입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결국 김 대표가 총대를 메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된 이들은 다름 아닌 임직원 150여 명. 똘똘 뭉친 임직원들은 2개조로 나눠 한 조는 소액투자자들의 위임장을 받으러 다녔고 나머지는 제품 생산에 진력했다.
“위임장은 받아오는 대로 금고에 넣어놨어요. 그걸 또 계산하고 그러면 일을 못한다는 판단에서였죠. 드디어 주총날 금고에서 위임장을 꺼냈는데, 무려 70%가 넘게 우리를 지지하면서 게임이 끝났습니다. 사실 경영권을 잃으면 회사 빚 수십억 원이 저한테 떨어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저희를 지지해준 임직원, 고객, 주주들 모두 제 생명의 은인인 셈입니다.”
경영권 방어 이후 김 대표와 회사는 달라졌다. 먼저 그는 죽을 때까지 ‘생명의 은인’들을 위해 ‘빚’을 갚아나가기로 다짐했다. 임직원의 결속력도 더 강해져 그때부터 매년 50% 이상 성장했다고 한다. 김 대표의 목표는 2015년 매출 1조 원, 세계 시장점유율 1위 달성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당장 올 1분기 영업손실 16억, 순손실 25억 원을 냈다.
“지난 2년간 중국 공장에 500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수익이 좋지 않은 건 그 때문이지요. 이제 중국 공장에서 제품이 나올 겁니다. 올해 매출은 3330억 원으로 전망합니다. 지금 배터리 관련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전기자동차 점유율이 10%가 되려면 현재 배터리 생산량의 10배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세계 시장점유율은 이미 수위를 다투고 있으니 2015년 매출 1조 원은 당연히 될 것입니다.”
천안 넥스콘테크 사옥 김종환 대표 집무실에는 15㎡가량의 연구실이 딸려있다. 그는 지금도 틈틈이 이 연구실에서 회사의 슬로건인 ‘미래 에너지 응용기술’을 구상한다. 배터리로 우주선을 쏘아 올릴 수 있다는 그의 상상이 언젠가 이 연구실을 통해 현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천안=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