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금 라인’ 조직에서 압수한 증거물들. 위조에 쓰인 컴퓨터ㆍ복사기ㆍ프린터는 물론 완성 전후의 위조유가증권이 보인다. 오른쪽은 위조 약속어음(위)과 진짜 약속어음을 비교한 사진. 사진제공=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
국내에는 두 개의 큰 전문 위조조직이 있다. 임 씨가 속한 조직은 그중의 하나로 국내 최고의 위조 실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유가증권 위조업계에서는 이들을 속칭 ‘황금 라인’이라 부른다. 이 모든 것은 최고 위조기술자인 임 씨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경찰에 따르면 임 씨는 위조업계에서 속칭 ‘최고의 그림’을 그린다고 소문이 나 있다. 많은 위조 유가증권 유통업자들이 임 씨가 위조한 유가증권을 찾는 이유라고 한다.
초등학교 학력의 임 씨는 서울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약 20년간 일했다. 처음에 임 씨는 인쇄소에서 인쇄물이나 어음 등을 배달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 어깨너머로 인쇄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점차 임 씨는 독학으로 복사기·스캐너·포토샵 등 인쇄 기기와 프로그램을 차례로 마스터했다. 이후 2001년경에 위조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임 씨의 솜씨는 뛰어난 기술 덕분에 위조업계에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번 범행에서도 임 씨는 그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수표에 삽입되는 은화(무궁화 문양) 위조 기술은 임 씨가 국내 최초로 독자 개발한 것이었다. 또 임 씨는 위조에 쓰이는 종이질과 절취선에도 신경 쓸 만큼 꼼꼼했다.
3회의 유가증권위조 범죄경력이 있던 임 씨는 지난 2006년에도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체포돼 약 3년간 복역했다. 2009년 초 출소한 임 씨는 그후 손을 씻으려 했지만 주변에서 그를 놔두지 않았다. 2009년 2월 총판인 이 씨가 임 씨에게 접근했다. 판매책(딜러), 전문 퀵배달원 등 자신이 관리하는 전문 위조조직을 갖추고 있던 이 씨는 국내 최고 기술자인 임 씨까지 영입해 그야말로 위조계의 완벽한 ‘황금 라인’을 완성하게 된다. 그렇게 임 씨는 이 씨 등과 함께 범행을 모의하며 서울 도봉구에 한 주택가에 컴퓨터·복사기·프린터 등을 갖추고 일명 ‘공방’이라고 불리는 위조수표 제조공장을 차렸다.
임 씨는 2009년 2월부터 2011년 4월 말까지 부도 처리되지 않은 번호를 가진 가계수표 등 1만여 장의 백지 은행발행 수표·약속어음을 위조하여 장당 10만~15만 원에 총판 이 씨 등에게 판매해 10억 원을 챙겼다.
이 씨 등 4명은 위조 유가증권 판매책인 딜러가 요구하는 금액을 위조된 수표·약속어음에 기재하고 고무인 등을 찍어 실존하는 회사의 사업자등록증 사본과 함께 판매책 양 씨 등에게 장당 30만~50만 원에 판매해 약 40억 원을 챙겼다. 이 씨로부터 위조 수표·어음을 건네 받은 양 씨 등 딜러들은 유명 일간지 등에 ‘진성 어음’ 광고를 게재하여 구매자를 모았다. 유명 일간지에 광고를 게재해 구매자들을 안심시킨 것이다. 이후 최 씨 등 전용 퀵서비스 배달원들을 통해 구매자들에게 50만~300만 원에 판매하는 방식으로 위조 수표·어음을 시중에 유통시켰다.
임 씨 일당은 수표와 어음을 할인해 준다는 일간지 신문광고를 내 사람들을 유인했다. 보통 어음은 지급기일이 있어 최종 소지인이 현금화하려면 지급기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음할인이란 자금이 필요할 경우 해당어음을 채권자에게 맡기고 만기 때까지의 할인율을 적용한 이자를 지불하고 미리 돈을 받는 걸 말한다. 예를 들어 1000만 원짜리 어음을 채권자에게 맡기고 900만 원을 받는 것이다.
그렇게 임 씨 일당은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건 사람들로부터 실재하는 당좌수표와 사업자등록증을 받아 이를 복제하고 수표와 어음의 일련번호를 알아낸 뒤 연락을 끊어버리는 수법을 사용했다. 이렇게 알아낸 일련번호는 임 씨가 위조해낸 수표·어음의 빈공란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은행 등에서 조회를 해도 실제 중소기업이 발행한 수표의 일련번호이기 때문에 위조수표로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임 씨의 ‘황금 라인’ 위조조직은 검거에 대비해 위조책, 총판, 딜러, 배달원으로 각자 역할을 분담하는 등 철저히 점조직으로 움직였다. 이들은 상호간에 실명도 모른 채 ‘강부장’ ‘주박사’ 등 호칭을 사용했고, 주문시에는 ‘대포폰’을 이용해 서로 연락을 취했다. 대포폰 이용시에도 주기적으로 번호를 변경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또 이들은 특정 퀵서비스만 이용해 검거시 의뢰자인 자신들의 신상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수고비 20만 원을 더 지급하는 등 전형적인 꼬리자르기식 수법으로 단속에 대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임 씨 일당의 범죄행각은 올초 첩보를 입수한 경찰의 3개월여 수사 끝에 덜미가 잡혔다. 무엇보다 임 씨의 ‘황금 라인’ 조직 일당을 모두 검거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임 씨의 ‘수첩’이었다. 임 씨의 수첩에는 거래자, 구매자, 위조책, 거래날짜, 미수금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경찰이 제조공장을 급습했을 당시 사무실에는 위조용지가 수북히 쌓여있었고, 단속 직전까지도 구매자에게 배달하기 위해 준비된 것으로 보이는 위조수표가 담긴 봉투 한 무더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액면가 1300억 원에 달하는 위조된 수표 및 약속어음 등 유가증권 1100여 장과 위조용지 등을 압수해 전량 폐기했다. 또 위조용 컴퓨터, 프린터 등을 증거물로 압수했다.
경찰조사 결과 임 씨 일당이 위조·유통시킨 수표·어음은 1만여 장에 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액면가로는 적게는 수천억 원에서 많게는 2조 원에 달할 것으로 경찰은 내다보고 있다.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천현길 강력팀장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번 사건은 위조 수표·어음 사건 중에서 사상 최대 규모”라며 “이렇게 유통된 위조 수표·어음이 영세 중소기업으로 흘러들어간 정황이 포착돼 몇몇 중소기업의 부도 등 2차 피해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훈철 기자 boazh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