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29일 부산저축은행에 대한 감사원 감사 무마 청탁과 함께 금품수수 혐의를 받고 있는 은진수 전 감사위원이 서초동 대검찰청에 소환돼 포토라인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저축은행을 둘러싼 검은 거래에 구 여권 핵심인물뿐 아니라 청와대와 현 여권 실세들까지 포함된 ‘리스트’가 떠돌고 있는 와중에 검찰이 “제대로 해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검찰이 각종 비리에 연루된 거물급 인사들의 실명공개 및 줄소환 가능성까지 내비치자 정치권은 그야말로 폭풍전야에 접어들었다. 특히 저축은행 비리 수사에 대한 검찰의 강경한 입장은 현재 정치권이 추진하고 있는 ‘대검 중수부 폐지’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의지로 해석되고 있어 적잖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검찰이 사활을 걸고 지키려하는 중수부는 검찰의 핵심기관이자 자존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중수부는 ‘권력’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수사기관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편파·축소·표적·과잉 수사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과거 대형 ‘권력형 게이트’ 수사에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야기한 장본인으로 지목받기도 했던 대검 중수부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봤다.
정치권 압박에 대해 검찰은 자존심과 명예를 걸고 사생결단으로 맞설 기세다. 검찰은 정치권의 ‘중수부 수사권 폐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중수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시키는 일이 급선무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 것 같다. 중수부 폐지안 소식에 저축은행 수사를 일시중단하는 ‘파업(?)’을 감행했던 검찰은 ‘권력’을 향한 단죄 의지를 드러내며 입장을 전환했다. 시간상 강경드라이브 공세가 예상되고 있는 현재 정치권의 압박에 맞서 검찰이 제시할 최후 히든카드는 ‘저축은행 리스트’로 분석되고 있다.
실제로 수사 착수 3개월 만에 영장기각 사례도 없이 이미 28명을 기소한 100여 명의 수사팀은 이번만큼은 중수부 사수를 위해서라도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이런 분위기에서 독을 품은 수사팀이 실명 리스트로 맞설 경우 정치권은 또 다시 격랑에 휩싸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중수부 폐지 논란의 핵심은 중수부가 그동안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여부로 귀결되고 있다. 실제로 한국 현대사에서 발생한 대형비리 사건은 거의 중수부의 몫이었다. 지난 20년간 주요 권력형 비리 수사를 통해 중수부가 형사처벌한 정치인, 고위 공직자, 기업인은 226명(96명 구속)에 달했다.
중수부는 장영자 씨 부부 어음사기사건, 명성사건, 5공비리사건, 수서사건, 율곡비리,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사건과 한보사건, 김현철 씨 비리사건, 세풍사건, 이용호 게이트 등 굵직한 사건들을 맡아왔다.
중수부가 세간에 이름을 알린 계기는 ‘단군 이래 최대 금융사기사건’으로 불리는 장영자 사건이었다. 권력을 등에 업고 벌인 장영자·이철희 부부의 6404억 원대 어음사기 사건을 수사한 중수부는 장 씨 부부를 포함해 경제계 인사 32명을 구속시켰으며 당시 여당인 민정당 사무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물러나게 했다.
내로라하는 대기업 총수들도 중수부에 줄줄이 불려갔다. 2003년에는 금강산관광사업 관련 청탁 명목으로 정치인들에게 돈을 건넨 혐의로 조사를 받던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50조 원대 분식회계 및 사기대출 혐의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구속 기소됐다. 한보그룹 한진그룹 한화증권 등도 중수부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중수부는 권력자 및 그 일가, 측근 등에 대한 사정수사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중수부는 1988년 ‘5공 비리’ 수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가족과 정권 실세들을 잇달아 구속시키며 입지를 굳혔다. 또 1995년에는 비자금 은닉 의혹 혐의로 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 기소하는 기염을 토했다.
‘대통령의 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영삼 정부 말기에 YS의 차남 현철 씨와 김대중 정부 말기 DJ의 세 아들인 일명 ‘홍삼트리오’에 대해 당시 검찰은 권력에 맞서 승부수를 띄웠다. 또 참여정부 초기 대선자금 수사 당시 여야 실세들에 대한 수사에서도 검찰은 매서운 단죄 의지를 드러냈다. ‘몸통’과 ‘핵심’은 건드리지 않는 ‘적당한’ 수사라는 의혹은 피할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거물급 인사들을 불러 조사를 벌이고 피의자 신분으로 포토라인 앞에 세우는 검찰 수사에 국민들은 그래도 희망을 걸었다.
2003년 정치권의 맹공에도 불법대선자금 수사로 중수부의 자존심을 세운 안대희 당시 중수부장은 국민검사라는 칭송까지 들었다.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은 “중수부 수사가 지탄받으면 내 목을 먼저 치겠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영욕의 역사와 맞물린 중수부 폐지 움직임 등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중수부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다.
2003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에서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최도술 전 청와대총무비서관 등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을 잇달아 구속시킨 중수부는 2008년에도 세종증권 매각 비리와 관련해 노 전 대통령의 친형 노건평 씨를 구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아들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권력층 인사들에 메스를 들이댐으로써 ‘성역 없는 수사’를 지향했던 중수부는 권력핵심을 수사하기 위한 본 목적과 달리 권력 실세들의 도피처로 악용되거나 권력과 야합하는 사정수사로 인해 ‘권력의 시녀’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정치적 시비 및 부실수사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1997년 한보그룹 사건 수사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IMF 사태를 불러온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한보그룹 부도 배경은 은행으로부터 천문학적인 금액을 불법으로 대출받은 것이었다. 부당대출 배경을 수사하기 위해 나선 중수부는 24일 만에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 등 9명을 구속기소하는 선에서 수사를 종결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부당특혜대출 배경으로 지목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 씨가 빠져 있는 점 등을 근거로 권력을 의식한 수사라는 비난이 들끊었다.
청와대와 감사원 등이 개입된 권력형 게이트 의혹을 낳았던 ‘오포 비리’ 사건도 결과는 허무했다. 경기 오포읍 아파트 건설 인·허가과정에서 정관계 거물들의 로비 의혹이 제기됐으나 중수부는 한현규 전 경기개발연구원장 등 12명을 기소했을 뿐 ‘몸통’은 밝혀내지 못했다. 2004년 대선자금 수사 당시 드러났던 800억 원대 ‘삼성 채권 로비’ 의혹 수사도 별 성과를 내지 못했고 20조 원대 분식회계 및 정관계 로비 의혹이 제기됐던 김우중 전 회장의 수사도 유야무야됐다.
시스템 사업자 선정 특혜 및 정관계 로비설로 얼룩진 ‘로또 비리’ 수사도 마찬가지였다. 1300억 원대 비자금으로 정관계 로비 의혹이 제기됐던 현대차 비자금 수사는 횡령 혐의 등으로 정몽구 회장을 구속했지만 정 회장 구속영장이 사전에 유출되면서 검찰은 영장 기각을 우려한 자작극 의심까지 받는 굴욕을 당했다. 한화·태광그룹 수사도 말만 요란했을 뿐 결과는 시시했다. 천신일 세중나모여행사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것과 관련해서는 중수부의 한계를 드러낸 게 아니냐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부실수사뿐 아니라 중수부는 표적·사정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정치검찰’의 오명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수부 폐지 논란에 기름을 부은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었다. 당시 검찰은 전직 대통령을 수사의 최종 타깃으로 함으로써 ‘죽은 권력’을 향한 표적·편파·과잉 수사 논란에 휩싸였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이 자살하자 노 전 대통령의 혐의와는 무관하게 정권과 검찰의 유착에 대한 비난이 터져 나왔다. 그후 이뤄진 씨앤그룹 수사도 이렇다 할 성과없이 ‘다 죽은 호남기업 뒤지기’라는 구설만 끌어냈다.
중수부 수사권 폐지 문제를 놓고 정치권의 공방이 가열되고 있는 현재 정치권 안팎에서는 검찰이 ‘저축은행 비리 리스트’ 카드로 승부수를 띄울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저축은행 사태가 슬슬 ‘몸통론’으로 향해가고 있는 것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제 중수부의 생사는 민심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수부 폐지 논란에 당면한 검찰로서는 저축은행 비리에 연루된 권력 핵심인사들의 검은 커넥션을 파헤쳐 국민들 앞에 낱낱이 까발리는 일이 급선무다. 즉 중수부가 아니면 유야무야됐을 사건과 연루 인물들을 정조준해 성역 없는 수사를 벌이고 성과물을 내놔야 한다.
국회 사법개혁특위가 ‘중수부를 폐지하겠다’고 공언한 6월 안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놔야 하는 검찰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형국이다. 거악척결의 보루로 인식돼 온 중수부가 영욕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