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수 경기지사. 작은 사진은 김영삼 전 대통령. |
그런데 ‘지지하고 싶은 후보가 있느냐’는 거듭된 질문에 김 전 대통령은 “거론되는 후보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고 그가 당선될 가능성이 크지만, 구체적으로 이름을 대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내가 이 사람과 둘이서 만나면 ‘당신이 틀림없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얘기하곤 한다”라고 밝혔다. 또한 염두에 두고 있는 후보가 한나라당 소속이며,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가까이 뒀던 사람이라면서 “나는 한나라당의 재집권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여권의 대권주자 진영에서는 저마다 “우리 얘기”라며 반색하고 나섰다. 물론 여당 일각에서는 “거물 정치인이 자신의 선호 대선주자를 밝혀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전형적인 구태정치”라며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더구나 재임시절 한때 최고의 지지율을 구가하던 YS였지만 IMF를 불러온 대통령이라는 점과 아들 현철 씨의 국정개입 농단 등과 같은 헛발질 때문에 지금의 대중적 인기나 지지도는 그때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 이런 점 때문에 여당 일각에서는 “YS가 찍는 순간 그 대권주자 인기는 뚝 떨어질 것이다” “펠레의 저주(월드컵 우승을 예언한 팀이 탈락하는 저주)처럼 YS의 저주에 걸려 대통령 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말들이 더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한때 정치 9단으로 불렸고, 3당 합당을 성사시켜 최고 권좌에 오른 타고난 정치적 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김 전 대통령이 점찍은 차기 대통령감이 누구인지에 대한 호기심도 부쩍 커지고 있다. 먼저 김 전 대통령이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가까이 뒀던 사람이라고 언급했던 부분을 통해 ‘찍은 정치인’ 리스트를 추려보면 YS가 문민정부 시절 야심차게 영입했던 3인방인 이재오 특임장관, 김문수 경기도지사, 홍준표 의원이 가장 유력한 후보다. 여기에 오세훈 서울시장과 정몽준 의원 등이 그 다음으로 지목되지만 김 전 대통령과의 정치 인연이 일천하다는 점에서 가능성은 낮다. 박근혜 전 대표 또한 평소 김 전 대통령이 유신독재를 자주 비판했고 이명박 정권 들어 더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은 더 낮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재야영입 3인방 가운데 가장 YS의 ‘총애’를 받는 차기 대통령감은 누구일까. 한나라당 의원들이나 전략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친이계의 대권주자 김문수 경기지사가 YS 심중의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하다. 김 전 대통령이 영입 3인방 가운데 김 지사를 가장 아꼈다는 증언도 나온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은 사석에서 자신의 외부인사 영입 성공을 자주 얘기하는데 언제나 김문수 지사가 대표적으로 언급될 만큼 신뢰가 깊은 것으로 전해진다.
김 지사와 의정활동을 했던 한 전직 의원은 이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은 같은 서울대 출신 후배에다 재야운동 경력도 있고 강직한 성품을 지닌 김문수 지사를 평소 눈여겨봐온 것으로 들었다. 김 지사는 1996년 신한국당에 입당한 뒤 15대 총선에서 YS의 아낌없는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YS의 한 최측근은 ‘마음만 먹으면 선거운동 끝나고 집 한 채는 넉넉하게 챙겼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지만 김 지사는 이에 대해 여러 차례 부인한 바 있음). 특히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박지원 국민회의 대변인을 눈엣가시처럼 여길 정도로 싫어했는데 영입 3인방 가운데 가장 신임하는 김 지사를 경기 부천 소사에 저격수로 특별히 낙점했다. 당시만 해도 박지원 대변인은 DJ의 총애를 받으며 거물로 성장하던 때라 정치신인 김 지사가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예상을 깨고 박 대변인을 물리쳐 YS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정치적 부자지간’이라고 할 정도로 가깝게 지낸다. YS가 이번에 차기 대통령감이라고 언급해도 크게 놀랄 일이 아닌 것 같다”라고 말했다.
‘상도동’과 인연이 있는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YS가 누구나 궁금해 하는 대권주자에 대해 언급해 관심은 가지만 크게 주목해볼 필요는 있겠는가. 가십 정도의 얘기일 뿐”이라고 반문하면서도 “보수계의 상징적 인물인 YS가 최근 들어 한나라당의 좌편향적인 정책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 같더라. 한나라당의 기본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결국 집토끼도 다 잃어버리고 정권 재창출도 어렵다. 대선이 되면 보수층의 결집이 나타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한나라당의 보수적인 핵심 가치는 계속 가져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김 지사가 꾸준하게 이승만 전 대통령 재조명과 같은 보수층의 이념을 대변하는 전도사와 같은 역할을 소신 있게 하는 것에 대해 YS가 높게 평가를 한다고 들었다. 보수적 가치 수호와 함께 김 지사의 정직함, 그리고 재산(2011년 3월 현재 4억 8579만 원)이 많지 않은 청렴함도 대권주자의 덕목으로 후한 점수를 주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YS의 ‘낙점설’에 대한 김 지사 측의 반응은 매우 조심스럽다. 최측근 차명진 의원은 이에 대해 “YS가 천기누설을 했나. 어쨌든 참 대단한 분인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사실 확인이 안 된 상태라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웃으며) 혹시 박근혜 전 대표 말하는 것 아닌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또 다른 의원은 “아무래도 YS가 3김 시대의 정치인으로서 구시대 이미지가 강한 데다 대중적 인기도 높지 않기 때문에 김 지사 측이 그의 지지를 등에 업고 언론 플레이를 하기가 부담스럽지 않겠느냐. 하지만 YS 발언이 김 지사와 연결될 경우 보수층의 숨은 지지를 확실히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속으로는 웃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상도동 측은 김 전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도중 대권주자 발언에 대해 “지금은 비서진이 모두 러시아 동행 중이라 답변을 드릴 수 없다. 김 전 대통령이 일요일 귀국하시면 또 말씀이 있지 않겠는가”라며 유보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실 김 지사는 김 전 대통령 등과 같은 보수층의 신뢰를 받고 있긴 하지만 그의 앞에 놓은 대권 가도는 ‘자갈밭’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박근혜 식으로’ 전당대회 룰이 개정돼 대권 경쟁 참여 자체가 ‘일단’ 좌절된 데다 지지율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친이계의 대표 주자로서 좀 더 적극적인 대권행보를 보이라는 요구에 대해 몸을 사린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친 이재오계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김문수 지사가 권력 의지가 없는 것 같다. 이번에는 박근혜 때문에 힘들다고 보고 차차기 쪽으로 돌아섰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럴 거면 우리로서도 김문수 카드에 미련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런 친이계의 불신 기류는 이재오 특임장관이 대권주자로 직접 나서는 빌미를 제공해주거나 외부인사 영입과 같은 특단의 대책을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질 전망이다.
하지만 김 지사는 이미 대권 출마 방침을 굳힌 것으로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김 지사의 최대 고민은 ‘언제’ ‘어떤 명분’으로 경기도청을 뛰쳐나오느냐에 있다. 사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뒤 임기의 절반을 채우지도 못하고 대권경쟁에 뛰어들 경우 그에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4·27 재보선 패배 후유증이 조기전당대회 개최로 적당히 치유되고 당의 쇄신도 흐지부지되는 시점이라 김 지사가 전격적인 행보를 할 시기가 여의치 않다. 김 지사의 한 측근은 이에 대해 “최근 박 전 대표의 당헌·당규 개정 반대 등에 목소리를 내고 당 쇄신을 장외에서 주문하는 등 소신발언을 이어가고 있지만 별 효과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늦어도 오는 10~12월 사이에는 지사직을 던지고 본격적인 대권행보를 시작해야만 한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김 지사 측은 또한 자신의 대선 공약도 기존 ‘친 기업 경제정책’에서 복지부분을 강화하는 쪽으로 선회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김 지사의 핵심 정책은 일자리 창출과 투자 유치였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들어 투자 유치 없는 기업들의 ‘탐욕’ 성장에 대한 국민적 실망과 빈부 격차와 양극화 심화로 인해 복지 요구가 거세짐에 따라 친 기업 경제 정책에 대해 수정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진다.
김문수 지사는 현재 한나라당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박근혜 대항마’다. 하지만 경기도청에 묶여 대권 행보가 자유롭지 않고 지지율도 정체상태라 어정쩡한 대권주자로 치부돼 왔다. 그런데 최근 그의 정치적 대부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심중의 대권주자를 언급하면서 김 지사도 그중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우연이 YS의 저주로 돌아올까, 아니면 잠자는 김문수를 깨우는 자극제가 될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청와대 ‘백기’…박근혜 시대 개막
▲ 지난 3일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오찬회동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정치권에서는 이번 ‘6·3 회동’을 사실상 ‘박근혜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날로 해석하고 있다. 4·27 재보선 패배 이후 전당대회 개최로 이어진 일련의 여권 추락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표의 위상은 확고부동해졌다. 회동을 본 한 초선 의원은 이에 대해 “박근혜를 위한 청와대의 대권주자 대관식으로 보인다”라고 코멘트했다. 박 전 대표는 이날 회동을 통해 그동안 누적돼 온 대권가도의 불확실성을 거의 제거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친이계의 저항은 청와대의 ‘항복 선언’으로 급격하게 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이재오 특임장관은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만남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며 양측 회동을 견제하려 했다가 청와대의 강력한 반발에 상당히 당황했다는 후문이다.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고려대 정치학)는 “이번 6·3 회동은 지난해 8월 회동의 ‘업그레이드’판이라고 보면 된다. 이제 박근혜 전 대표를 둘러싼 당내의 잡음은 거의 제거됐다고 봐야 한다. 특히 최근 양측의 회동에 대해 쓴소리를 하며 견제구를 날렸던 이재오 특임장관의 몽니도 이 대통령이 한꺼번에 판을 정리해버렸다”라고 밝혔다. 고 박사는 특히 이번 회동의 핵심을 박 전 대표의 ‘역할 확대’라고 꼽고 있다. 그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이제 나서도 되겠느냐’라고 하자 이 대통령이 ‘이제 나서도 된다’라며 화답한 것이 중요하다. 이제 박 전 대표는 거칠 것이 없다”라고 덧붙였다.
이런 기류 때문인지 박 전 대표는 이날 회동에 대해 상당히 흡족해 했다는 후문이다. 특히 이날 회동에서 친이계나 친박계 등 계파에 대한 얘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소장파의 한 의원은 “이 대통령이 ‘앞으로 더 이상 친이계의 저항과 같은 잡음은 없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약속했기 때문에 더 이상 계파갈등을 문제 삼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박 전 대표가 ‘통합으로 가야 한다’ ‘하나가 돼야 한다’라며 원론적인 점을 강조한 것도 ‘앞으로는 계파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권경쟁이 본격화되면서 계파갈등은 정계개편 시도나 분당과 같은 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최근 이재오 장관이 양측 회동에 불만을 나타낸 배경에는 “(친 이재오계가) 대통령에게 버림받았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데 너무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는 것 아니냐. 우리의 목소리를 내자”는 내부 강경 기류에서 나온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 친이계 의원은 “당권·대권 분리 선출을 관철시켜 다른 주자들의 손발을 묶어놓고 앞으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이제 세상은 평정됐으니 살살 움직여보겠다는 의미 아니겠느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본격적인 대권경쟁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 대통령이 너무 성급하게 박근혜 전 대표 쪽의 손을 들어준 것처럼 비쳐져 불만스럽다는 얘기도 나온다. 친이계의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경쟁 없이 ‘억지 춘향’ 식으로 추대된 박 전 대표의 경쟁력에도 결코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