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스가 BBK 및 김경준 씨(왼쪽)와 다투던 투자금 반환소송을 전격 취하하면서 현 정부와 에리카 김(오른쪽) 남매 간 ‘이면합의설’이 재부상하고 있다. 연합뉴스 |
‘에리카 김 국내 귀국(2월 25일)→면죄부성 검찰수사→에리카 김 미국 복귀(3월 말)→다스, 김경준 상대로 한 소송 취하(4월 5일).’
이러한 일련의 흐름에 대해 정치권에선 이명박 정부와 에리카 김 사이에 ‘사전 조율’이 있었을 것이란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임기 후반기에 접어든 이 대통령이 여전히 ‘불씨’를 안고 있던 BBK 사건을 마무리 짓기 위해 에리카 김을 ‘기획입국’시켰다는 시각이었다. 이와 관련, <일요신문>은 에리카 김이 귀국하기 직전 LA에서 여권 중진이자 이 대통령 측근인 K 씨와 만났다는 내용을 보도하기도 했다. 실제로 에리카 김은 검찰에 나와 “지난 2007년 대선에서 ‘BBK가 이 대통령 소유였다’는 주장은 거짓”이었다고 말을 바꾸며 이 대통령에게 유리한 발언을 했다. 그 대가였을까. 에리카 김은 대부분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 및 불기소 처분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를 놓고 야권은 물론 검찰 내부에서조차 ‘짜 맞추기 수사’라는 주장이 제기됐었다. 전현희 민주당 대변인은 “아무리 막아도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라며 “BBK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반드시 국정조사나 특검을 도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에리카 김 수사에 관여했던 한 검찰 관계자는 “에리카 김은 검찰에 소환돼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동생인 김경준 씨와의 대질신문에서도 당당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에리카 김의 변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면서 “주가조작, 횡령 등 죄명이 분명한 에리카 김에게 석연치 않은 이유로 기소유예 결정을 내리자 수사진 사이에서 불만이 팽배했던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8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김경준 씨도 내년 후반기 사면될 것이라는 추측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처럼 에리카 김이 검찰로부터 면죄부를 받고 미국으로 돌아가자 BBK 사건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드는 듯했다. 그러나 다스가 “BBK에 투자한 원금 190억 중 140억 원을 돌려달라”며 에리카 김 남매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금 반환소송을 지난 4월 5일 전격 취하하면서 의혹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지난 2003년 5월 소송을 제기한 이후 8년간 법정 싸움을 벌이던 다스가 별 다른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송사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당시 다스 변호인 측 관계자는 “의뢰인 요청으로 소를 취하했다. 재판부도 신청서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소송은 끝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취하 사유에 대해서는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야권 등에서는 다스가 소송을 포기한 시점이 에리카 김의 미국 복귀 직후라는 것에 주목했다. 이 대통령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다스가 140억 원이라는 손해를 감수하기로 한 배경에 에리카 김의 귀국 및 검찰 수사가 연관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된 것이다. 이는 에리카 김이 현 여권 핵심부와 교감하에 국내로 들어왔을 것이라는 관측과도 맞닿아 있기도 했다(자동차 시트 등을 생산하는 기업인 다스는 ‘대통령 형님’ 이상은 씨와 ‘대통령 처남’ 고 김재정 씨가 지분의 대부분을 소유해 이 대통령이 실소유주 아니냐는 의혹을 샀던 바 있다).
그런데 최근 에리카 김 남매가 2월 초 다스에 140억 원을 비밀리에 송금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공개되면서 작지 않은 파장이 일고 있다. 이는 김경준 씨와 민사소송을 벌였던 옵셔널캐피탈(옛 옵셔널벤처스) 측에 의해 최초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씨는 지난 2001년 광은창투를 인수해 설립한 옵셔널캐피탈 자금 319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2004년 미국 현지에서 소송을 당한 바 있다. 오랜 공방 끝에 옵셔널캐피탈은 올해 초 김 씨로부터 371억 원을 배상받으라는 승소 판결을 받았고, 김 씨 재산 일부에 대한 권리를 확보했다. 여기엔 이번에 김 씨가 다스에 돈을 보내기 위해 사용한 스위스은행 계좌도 포함돼 있었다. 즉, 김 씨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돈이었던 것이다. 옵셔널캐피탈 측 관계자는 “김 씨가 140억 원을 빼낸 것은 누가 보더라도 불법 행위”라면서 “돈을 되돌려 받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문제의 계좌는 연방재판부에 의해 지난 2008년 12월 31일 동결된 것이기도 했다. 당시 재판부는 “김 씨 회사로 추정되는 알렉산드리아 인베스트먼트 (명의의) 스위스 계좌의 돈을 누구도 인출할 수 없다”고 명령했다. 이는 옵셔널캐피탈과의 민사소송과는 별개 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미국 연방법엔 시민권자가 중죄를 저지르고 외국으로 재산을 빼돌릴 우려가 있을 때 재산을 몰수하는 규정이 있는데, 김 씨가 한국에서 횡령으로 물의를 일으키자 미국 정부가 해당 계좌에 대한 동결을 요청했고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앞서의 옵셔널캐피탈 관계자는 “김 씨와의 민사소송에서 승리하면서 이 계좌에 대한 우선적인 권리를 획득했다”면서 “연방법원에 이를 알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동결된 이 계좌에서 거액의 돈을 옥중의 김 씨는 어떻게 다스 측으로 송금할 수 있었을까. 연방재판부 역시 옵셔널캐피탈로부터 이러한 내용들을 접하고 이 부분에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담당 판사가 ‘연방법을 무시한 처사’라며 크게 화를 냈다는 후문도 나오고 있다. 재판부는 연방검찰에 이번 사건에 대한 수사를 지시하는 한편, 관련자들에게 소명을 요구해 놓은 상태다.
미국 현지의 한 언론인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 사건은 현재 연방검찰 형사부가 맡고 있다. 다스나 김 씨가 인출 금지 명령을 어겼다는 게 사실로 드러날 경우 형사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검찰에서는 이 과정에 조력자가 있었는지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고 확인 중인 것으로 안다”면서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면 한국 정부 차원에서 도움을 줬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연방검찰이) 대사관이나 국정원 등 일부 직원들을 접촉해 진상 파악에 나선 모습이 포착됐다”고 전했다.
이 대통령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이번 사건에 연방검찰이 직접 나서자 국내 사정기관 역시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국내 사정기관 등에선 미국 현지 ‘핫라인’을 통해 시시각각 정보를 수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스와 김 씨의 이러한 거래는 에리카 김의 ‘기획입국’ 논란을 증폭시킬 전망이다. 벌써부터 민주당은 다음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를 집중 공략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추적에 들어갔다. 특히, 에리카 김 입국 및 다스 소송 포기 내막 등에 여권 핵심부의 어떤 인사가 관여했는지를 집중 추궁할 계획이다. 현재 민주당 안팎에서는 사정기관 최고위급 인사 한 명과 앞서 언급한 K 씨 등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2월 초 김 씨의 140억 송금을 서막으로 다스의 소송 취하까지 ‘완벽한’ 한 편의 영화 아니냐”면서 “이 시나리오를 누가 만들었는지, 또 어디서 실무를 맡았는지를 끝까지 파헤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그는 “규정대로라면 김 씨가 다스에 보낸 140억 원은 옵셔널캐피탈 손해보전에 사용돼야 한다. 연방검찰 수사 결과가 나와봐야 하겠지만 현직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회사가 그러한 일에 연루됐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라 망신”이라고 덧붙였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부동산 사업 추진하다 송금사건 후 파산 신청
한때 미국 한인 사회에서 ‘잘나가는’ 변호사였던 에리카 김은 지난 2007년 대선에서 BBK 논란의 핵심 인물로 떠오른 이후 사실상 두문불출했다. 연방 법원에 의해 대부분 재산이 동결됐을 뿐 아니라 특별한 수입도 없어 생활이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거주하고 있는 주택의 재산세가 2008년부터 체납 상태였다는 것이 이를 나타내준다. 사정기관 몇몇 관계자들은 얼마 전 김 씨의 갑작스런 귀국을 이런 배경에서 설명하기도 했다. 즉, 이명박 대통령 퇴임 전 BBK 사건을 마무리 짓고 묶여 있는 재산을 되찾고자 했다는 것이다.
지난 2월 25일 언론의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귀국했던 에리카 김은 검찰 수사를 통해 면죄부를 받고 3월 말 미국으로 돌아갔다. 정치권에서는 에리카 김이 이미 지난해부터 귀국을 결심하고, 만반의 채비를 갖췄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11월 밀렸던 세금을 한꺼번에 납부하며 주변을 정리한 것이나 일류 로펌 변호사를 선정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야권에서는 생활고에 시달리던 김 씨가 여기에 필요한 ‘목돈’을 어디서 구했는지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고도 주장한다.
검찰 조사 이후 홀가분한 상태로 미국에 입성한 에리카 김은 교민사회에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에리카 김과 친분이 있는 한 재미교포 사업가는 “복귀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특히 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면서 “LA 외곽 근교 부동산을 알아보고 다녔던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미국 현지의 한 언론인 역시 “에리카 김을 만난 사람들에 따르면 2007년 이전으로 돌아왔다는 말이 파다했다. 얼굴 표정도 무척 밝았다고 한다. 개발 사업에 투자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면서 “에리카 김이 한국에 구속 수감 중인 동생도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최근 에리카 김은 다시 주춤한 모습이라고 한다. 연방검찰이 자신과 동생을 향해 칼을 빼들었기 때문이다(본문 참고). 또한 얼마 전엔 에리카 김이 연방법원에 파산을 신청한 것이 알려져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현재 법원은 에리카 김 재정 상태를 보고 받고 파산 여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놓고 야권에서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다스와의 수상한 거래 및 이에 대한 연방검찰 수사 착수 소식이 공개되자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파산을 신청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는 것이다. 앞서의 재미 언론인은 “법원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던 에리카 김의 갑작스런 파산 신청을 의아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