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용규 씨는 경기고와 서강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삼성물산에 입사한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그가 카자흐스탄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5년. 당시 삼성물산 독일 프랑크푸르트지사에서 일하던 차 씨는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지점장으로 옮기게 됐다.
삼성물산은 카자흐스탄 정부의 요청으로 1995년 6월부터 2000년 6월까지 5년간 카작무스를 위탁경영했다. 이때 위탁경영을 맡은 사람이 바로 차 씨였다. 카작무스는 구리 채광 및 제련업을 하는 카자흐스탄의 국영기업이었다. 그는 2년 만에 카작무스를 흑자로 돌려놓았고, 덕분에 3년 만인 1998년 부장으로, 2000년엔 카작무스의 공동대표에까지 오르는 초고속 승진을 했다.
정상화 이후 카자흐스탄 정부는 보유 지분을 삼성물산에 넘겼고, 삼성물산도 지분 전체를 2001년과 2004년 2차례에 나눠 매각했다. 이때 차 씨는 현지 고려인인 블라디미르 김 씨 등과 함께 지분 일부를 사들였다.
차 씨는 카작무스를 2005년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시켰고, 이후 국제 구리시장 호황에 힘입어 시가총액이 100억 달러까지 치솟는 대박을 터뜨렸다. 그는 이듬해인 2006년 말과 2007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보유 지분을 모두 매각하고, 카작무스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차 씨가 얻은 매각 차익이 1조 원이 넘으면서 그는 순식간에 세계적 거부 반열에 올랐다. 그는 ‘구리왕’ ‘샐러리맨의 신화’로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차 씨의 행적은 국내 언론의 큰 관심사였지만 그는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일각에서는 실종설, 마피아 납치설 등이 제기되기도 했다.
차 씨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 2008년. 그는 자신이 인수한 서울 강북지역의 한 백화점 경영 문제를 놓고 분양자들과 협상하는 자리에 나타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차 씨가 백화점을 인수하기 위해 대표적인 조세피난처인 말레이시아 라부안에 사무실을 둔 월드와이드컨설팅(월드와이드)을 이용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또 차 씨가 월드와이드를 통해 서울 강남, 경기 안산, 제주 등지에서 호텔 빌딩 상가 등 당시 시가로 3000억 원대에 달하는 부동산을 확보한 사실도 드러났다. 차 씨가 최근에는 라부안에 주소지를 둔 투자회사인 ‘제이제이인베스트먼트사’를 앞세워 국내 기업들의 전환사채(CB)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 투자에 나선 정황도 포착됐다.
국세청은 차 씨가 거액의 시세차익을 올렸으나 한국과 영국 어디에도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고, 국내에서 부동산과 주식 등 사실상의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차 씨에 대한 추징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재계 일각에서는 이번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먼저 차 씨가 카작무스 지분을 팔아 시세차익을 올렸던 때나, 이후 그가 국내 부동산업에 뛰어들었던 때엔 국세청이 과세에 나서지 않다가 이번에 갑자기 과세에 나선 것은 최근 역외탈세에 대한 지나친 실적주의 때문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국세청은 이현동 청장 취임 이후 역외탈세에 대한 세무조사를 강화했다. 지난 4월엔 ‘선박왕’ 권혁 시도상선 회장에 대해 4000억 원이 넘는 추징금을 부과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권 회장과 관련한 보고를 받고 상당히 만족해했다는 후문이다. 일각에서는 차 씨에 대한 추징액이 권 회장의 추징액을 훌쩍 뛰어넘어 적게는 5000억 많게는 7000억 원에 이를 것이란 말도 나온다.
권 회장과 마찬가지로 차 씨에 대한 추징도 결국에는 치열한 법리논쟁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4000억 원을 추징당한 권 회장은 ‘국내 거주일이 180일이 안 된다’는 논리로 조세불복소송을 준비 중이다. 차 씨도 권 회장과 마찬가지로 ‘일 년에 한 달도 채 국내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국내 거주자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한 세정당국 관계자는 “이번 추징에는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다”며 “권 회장이나 차 씨의 경우 국세청이 조세불복소송에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판결이 나려면 적어도 2~3년이 걸릴 텐데 소송에서 지더라도 현재 국세청 고위직들은 그 때쯤이면 ‘자연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며 “실제 추징 결과와는 상관없이 달콤한 열매를 먹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세무조사의 불똥이 삼성으로 튀고 있는 것도 주목해볼 만한 부분이다. 현재 차 씨에 대한 세무조사 사실이 어떻게 외부에 알려지게 됐는지는 미스터리다. 국세청은 공식적으로 차 씨에 대한 세무조사 사실을 확인해주지 않고 있다. 때문에 재계 한편에서는 이번 세무조사 소식이 청와대나 정치권 등을 통해 알려졌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삼성물산으로 파편이 튀었다는 점에서 최근 각을 세우고 있는 정부와 삼성 간의 관계가 주목받고 있다.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지난 2005년 차 씨가 거액의 시세 차익을 올렸을 때부터 삼성의 비자금 가능성을 거론해왔다. 이번 세무조사 소식이 알려지자 삼성은 서둘러 해명자료를 내는 등 조기진화에 나섰다. 그렇지만 여전히 여론은 차 씨와 삼성 간의 관계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국세청도 차 씨의 지분에 대해 삼성으로부터 사실상 증여받은 것으로 보고 증여세를 부과하는 방침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럴 경우 사실상 차 씨의 지분이 삼성의 것이었다는 등식이 성립된다. 삼성이 또 한 번 도덕성 논란에 휩싸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결국 구리왕 차용규 씨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향후 작지 않은 후폭풍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