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일 이명박 대통령이 여의도 금융감독원을 불시에 방문, 금융감독원이 최대의 위기이며 국가신뢰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석동 금융위원장(맨 왼쪽)과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방문을 마친 이 대통령을 배웅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모피아’는 옛 재무부(MOF) 출신 경제 관료를 마피아에 빗대어 일컫는 말이다. 마피아처럼 조직이 끈끈하고 힘도 막강해서 붙여졌다. 재무부는 지난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금융정책 세제 국고관리 기능을 맡았던 부처로, 김영삼 정부 시절 재정경제원으로 합쳐졌다. 현재는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로 분산돼 있다.
재무부 출신 중에서도 금융정책을 총괄했던 금융정책국 출신들이 모피아 ‘이너서클’로 분류된다. 최근에는 모피아와 금감원을 더불어 ‘금피아’란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재계에서 ‘정권은 바뀌어도 재벌은 영원하다’란 말이 있는 것처럼 금융권에서는 ‘정권은 바뀌어도 모피아는 영원하다’란 말도 있다.
모피아가 포진하고 있는 기획재정부, 금융위, 금감원이 금융정책 전반을 주무르고 있기 때문에 이번 저축은행 사태와 관련한 직·간접적 책임선상에 있다. 때문에 최근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금융 개혁의 또 다른 초점은 금융정책에 있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온 모피아의 힘을 얼마만큼 축소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난 9일 발족한 국무총리실 산하 금융감독혁신 태스크포스(TF)팀 13인에는 금감원 출신이 한 명도 포함돼 있지 않았다. 그만큼 모피아에 대한 불신이 정부 내에서도 강하다는 의미다.
이명박 정권 집권 후반기에는 모피아 출신 인사들이 요직에 포진되어 있지만, 사실 집권 초반에는 민간 출신 인사들을 주로 기용했다. 특히 ‘MB맨’으로 불리는 대통령의 측근들이 금융권 곳곳에 자리 잡았다. 이러면서 모피아와 MB맨들의 충돌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 금융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과 금융위원회 간 힘겨루기였다. 황 전 회장은 지난 대선 기간 이명박 캠프에서 경제살리기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런 황 전 회장에게 금융위원회는 지난 2009년 9월 우리은행장 재직 시절 투자 과정에서 관련 법규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직무정지 3개월 상당의 제재를 부과했다. 하지만 황 전 회장은 제재에 불복,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1심에서 승소했다. 당시 황 전 회장은 “덫에 한 번 걸리면 벗어나지 못 한다”며 금융위에 불만을 내뱉기도 했다.
‘MB노믹스’의 기초를 닦았던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 역시 민간 출신으로 금융위에서 일하며 어려움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회 정무위 소속 한 의원실 관계자는 “전광우 전 위원장이 민간 출신으로 금융위 개혁에 앞장섰지만 모피아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서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한때 내부에서 ‘영’이 서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다”고 말했다.
모피아로 꼽히는 김석동 금융위원장을 후임으로 임명한 것도 이 대통령의 이런 고민이 반영된 것으로 전해진다. 때문에 정부가 이번 저축은행 부실 사태를 계기로 금융감독기관 개혁에 나선 것은 사실상 모피아의 힘을 빼기 위해서라는 말도 나온다. 특히 청와대 내 교수 출신 MB 측근들이 이번 금융기관 개혁에 앞장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장 모피아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금융감독권’을 놓고 정부 측에 반기를 들고 있다. 금융감독권은 검찰의 수사권처럼 금융감독원에게는 전가의 보도로 여겨진다. 김 위원장은 금융감독권을 한국은행과 나눠야 한다는 주장이 금융감독혁신TF를 중심으로 제기되자 지난 9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공권력적인 행정작용인 금융감독권을 아무 기관에나 주자고 할 수는 없다”고 발끈했다.
이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한 발 더 나아가 “행정권의 배분은 헌법에 따른 것”이라면서 “(금융감독권 재조정은) 헌법의 대원칙을 훼손한다는 논란을 부를 수 있다”고 법적 논란까지 예고했다. 정부 관료인 금융위원장(장관급)이 총리실 활동에 대해 반발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현재까지 모피아의 반발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가 빼든 카드는 감사원과 검찰이다. 감사원은 최근 조짐이 보이고 있는 ‘카드 대란’에 대한 금감원의 책임을 규명하기 위해 감사에 착수하며 금감원을 압박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는 저축은행 사태와 관련한 금감원 비리에 대한 전 방위적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과연 정부와 모피아 간의 힘겨루기에서 어떤 결말이 나올지 주목된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
‘미끄럼틀 태우기’ MB의 반전
뒤늦게 모피아와의 ‘전쟁’에 나서긴 했지만, 사실 이명박 정부는 그 어느 정부보다 모피아를 많이 중용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강만수 산은금융 회장이다. 재무부 출신으로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이었던 그는 이명박 정부에서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냈고, ‘MB노믹스’의 기초를 닦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외환위기 당시 금융정책실장이었던 윤증현 전 장관 역시 노무현 정부 때 금융감독위원장에,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에 기용됐었다. 김석동 금융위원장,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 권혁세 금융감독원장 역시 모피아로 분류된다. 여기에다 유재한 정책금융공사 사장, 최규연 조달청장, 김용환 수출입은행장, 진병화 기술신용보증이사장, 이승우 예금보험공사 사장, 장영철 캠코 사장 등 금융기관의 수장이 대부분 모피아다. 이우철 생명보험협회장, 문재우 손해보험협회장, 이두형 여신금융협회장, 신동규 은행연합회장 등 민간 기관장들도 모피아가 적지 않다.
다만 이명박 정부에서 중용되는 모피아 출신 인사들은 이명박 대통령과 오랜 기간 인연을 맺어온 ‘믿을맨’이라는 특징이 있다. 게다가 집권 중반을 넘어서면서 성장률 둔화와 물가불안, 유럽발 재정위기 등이 불안요소로 부각되자 이 대통령이 위기 관리자로서 모피아를 중용했다는 후문이다. 이에 대해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필요할 때는 가져다 쓰고, 사고가 터지니까 책임을 돌리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