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8월 10일 이명박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재오 특임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환담장으로 걸어가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이는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 보여주는 교묘한 줄 세우기 권력운용에서 비롯된다. 이상득-이재오라는 여당의 양대 산맥은 그동안 이명박 대통령의 용인 아래 적당한 권력균점을 이뤄왔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언제나 ‘형님’ 이상득 의원의 승리였다. 18대 총선 과정에서 이 장관이 55인 회동을 이끌며 ‘형님’을 밀어내려 했지만 성골의 벽에 막혀 실패했다. 피를 나누지 않은 진골이 가진 한계였다. 그 뒤로도 이 장관은 이 대통령과 유일하게 자유 독대 권한을 누리며 2인자로 행세했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성골인 ‘형님’의 벽을 넘지 못했다.
내년 총선과 대선의 권력구도를 세팅하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던 이번 원내대표 경선 대이변도 이명박 정권의 ‘성골 불패의 법칙’이 또 한 번 확인된 사건에 불과하다. 재보선 전 이상득-이재오 회동이 알려져 양측의 화해가 예상됐다는 일부의 보도도 있었지만, 당시 두 사람이 원내대표 대리인을 두고 절충을 벌이다 결국 합의가 깨졌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당시 이 대통령이 어떤 스탠스를 취했는지 확인이 되지 않지만, 양측이 합의에 실패했다는 것을 두고 ‘두 사람 중 한 명의 손을 이 대통령이 들어줬을 것’이라는 관측은 쉽게 나왔다.
그리고 그 예상의 주인공은 성골 이상득 의원이었다. 이상득 의원이 ‘애송이’로 보며 무시하는, 바로 그 소장파가 밀었던 황우여 의원을 지지했던 것이다. 이 장관으로서는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그런데 친 이재오계 내부에서는 이상득 의원보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훨씬 많이 내비치고 있다. “이번 경선에도 결국 ‘이심’이 작용했다”며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여당의 대체적 분위기는 “‘이심’이 실제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데 있다. 경선 패배 직후 친 이재오계에서 “이 장관이 재보선 직전 두 차례 친이(친 이명박)계 모임을 소집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 또는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라며 이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도 ‘주군’에게 배신당한 서운함의 표출이었다는 것이다. 이 장관 측 핵심의원 소스로 보도된 바에 따르면 “대통령을 위해, 대통령의 지시로 의원모임을 했는데, ‘이재오가 분열의 원흉’이라고 하는 것을 더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이 장관의 뜻이다. 정권의 성공을 위해 온갖 일을 했을 뿐 단 하나의 사심도 없었지만 모든 욕을 다 먹고 있다. 다시는 그런 일을 안 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보도 뒤 이 장관 측에서 서둘러 “두 자리 모두 초청에 의해서 갔을 뿐”이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를 두고 당내에서는 “언론플레이에 능한 이 장관이 측근을 통해 이 대통령에게 서운함을 나타낸 것과 함께 일종의 경고 메시지를 날렸다”는 분석이 즉각 나왔다. 대통령을 걸고 넘어간 것 자체가 “더 이상 청와대 눈치를 안 볼 것”이라는 반격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친 이재오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경선 패배를 “사실상 이명박 대통령에게 배신당한 것”으로 규정하며 이를 ‘이재오 역할 소멸론’으로까지 설명한다. 그는 이에 대해 “이상득 의원이 사석에서 ‘천지 모르고 설친다’며 비방만 하던, 그 소장파가 밀었던 황우여 의원을 지지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 대통령과의 교감 없이 이 의원이 그런 무모하고 이해하기 힘든 결정을 할 리가 없다고 본다. 권력구도가 이명박-박근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 장관이 희생양이 된 것이다. 결국 이 장관도 1회용 정국 관리용에 불과했던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대세인 이상 이 장관의 존재는 걸림돌일 뿐이다. 사실 지난해 안상수 대표 체제가 출범했던 것이 이 대통령이 이 장관에 준 마지막 선물이었던 것 같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 대통령은 절대 정치 문외한이 아니다. 오히려 이번 경선을 보면 냉정하게 측근을 내치는 정치 고단자다. 이 장관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다면 다시 그에게 역할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본인 능력에 따라 대권 도전을 할 수 있는 길은 열어주겠지만, 지금으로선 계파 존폐 여부를 걱정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친 이재오계의 대변인 격인 권택기 의원이 이와 관련해 “이제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 않는다면 (한나라당 원내대표 경선 때 결집한 친이계) 64명의 중심축도 급격히 무너질 수 있다”라며 이 대통령에게 서운함을 표출하며 경고성 멘트를 날린 것도 이재오 역할 소멸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장관으로서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이재오 왕따 정국’을 탈출하기가 쉽지 않다. 먼저 이 대통령이 쉽게 그를 풀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소장파의 한 초선 의원은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이 장관이 이번 경선 패배를 구실로 뛰쳐나가고 싶다고 할 경우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으로 본다(이 장관은 이미 이 대통령에게 ‘언제든지 백의종군할 각오가 돼 있다’는 뜻을 밝혔던 것으로 알려진다). 오히려 이 장관이 앞으로도 계속 역할을 해줄 것을 바라는 입장인 것으로 안다. 그런데 이 장관이 물러나게 된다면 친 이재오계의 반발 등으로 이상득 라인인 임태희 대통령실장 등도 같이 물러나게 해야 하는 부담이 이 대통령에게 있다. 그렇게 다 쳐내면 대통령 주변에 핵심측근은 거의 없게 된다. 후반기 안정적인 국정운영 측면에서도 이 대통령이 이 장관을 쉽게 떠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당에 복귀하게 되면 ‘박근혜 대세론’으로 굳어져가고 있는 당을 다시 계파전쟁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꼴이 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 장관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관에 빠진 형국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성공을 위해 마냥 희생만 하다가 자칫 당권도 잃고 총선에서도 계파가 몰락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재오계 내부에서는 “당권 도전이나 대선 등을 위해 이 장관을 풀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장관은 재기의 카드를 꺼내보지도 못한 채 서서히 힘을 잃어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친 이재오계 강경파에서는 이 대통령이 계속 이 장관을 묶어둘 경우 과감하게 뛰쳐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왕따 정국’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전격 사퇴하고 ‘독립선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최근 사퇴를 한 이회창 전 선진당 대표와의 연대 등 다양한 조합이 있을 수 있다. 보수대연합을 명분으로 당을 뛰쳐나가 ‘수도권+충청권’ 연합의 정계개편을 시도하거나, 민주당 비주류와 개헌을 매개로 정계개편을 짜보는 경우의 수가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성공’이 이 장관의 정치적 존재근거인 이상 그가 이 대통령과 척을 지며 독자적 행보를 할 가능성은 여전히 낮은 편이다.
그래서 “좀 더 지켜보자”는 온건파의 의견이 여전히 만만치 않게 나온다. 이 장관 측의 한 핵심참모는 이에 대해 “이 장관이 함부로 당·청 가교 역할을 버릴 수는 없다. 그동안 해온 역할이 있기 때문에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여전히 이 대통령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다. 당의 새 지도체제가 갖춰지는 조기 전당대회까지는 특임장관직을 수행하는 게 여권 혼란을 막는 최선의 길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당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 지도부를 견인해내는 ‘큰’ 역할을 해낸다면 다시 한 번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대권의 꿈을 펼쳐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선택지로는 ‘독립선언’과 ‘현상유지’의 절충안인 ‘백의종군’이 있다. 당에 ‘이상득-친박-소장파’의 신주류가 들어선 이상 그의 역할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차라리 깨끗하게 당으로 복귀해 권토중래하자는 것이다. 이때 이 장관이 당 대표 선거 등에 직접적으로 나서지는 않겠지만 상황과 여건이 되면 다시 나설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 장관은 아직 당내 60여 명의 의원 지지를 받고 있고 원외지구당 위원장 30여 명, 그리고 전국의 이재오 조직이 건재해 있다. 이들을 등에 업고 이상득-소장파-친박과의 다양한 합종연횡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친 이재오계의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소장파가 이상득 의원을 몰아내기 위해 흔들기를 시도할 경우 이 의원 측과 연대해 소장파를 밀어낼 수 있다. 반면 소장파와는 원래 55인 회동에서 반 이상득 전선에 섰던 전력이 있는 만큼, 오히려 개혁성향이 강한 이 장관이 연대하기 더 좋다. 친박계와도 이 장관이 박 전 대표에게 대권을 매개로 ‘충성서약’을 할 경우 접점을 찾을 수도 있다. 이런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다. 이 장관도 ‘포스트 박근혜’까지 내다보면서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장고에 들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오 장관은 경선에서 패배한 뒤 졸지에 주류에서 비주류로 전락했다. 이를 뒤집기 위해 그는 현재 독자행보, 권토중래, 연대모색 등의 다양한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하지만 이 카드 가운데 독자행보라는 초강수 외에 어느 하나도 자신이 직접 쥐고 있는 게 없다는 데 근본적인 불행이 있다. 그의 목숨은 이제 ‘이명박-박근혜’가 짜고 치는 고스톱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박근혜 넘나, 그 밑에 엎드리나
지난 6일 원내대표 경선 여파로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이재오 특임장관. 그는 이제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60여 명의 계파를 이끌고 있는 그는, ‘포스트 박근혜’도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경선 패배의 후유증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진정한 계파의 수장으로 장수할 길도 열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친 이재오계에서는 ‘박근혜 전 대표도 연대의 대상에 넣자’라는 주장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이 장관이 당권도전을 선언하기 위해선 ‘박근혜’라는 강을 건너야만 한다. 친박계에서는 현재 “이 장관의 18대 공천 학살 전력 때문에 연대는 절대 없고 오히려 복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널리 형성돼 있다. 벌써부터 친박 일각에서는 “19대 총선 때 이재오 계파 후보들이 나서는 지역구에 친박 무소속 ‘닌자’를 보내 낙선시키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그만큼 이 장관에 대한 반목은 뿌리 깊다. 이런 점 때문에 이 장관이 박 전 대표와 연대할 공간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게 대체적 인식이다.
하지만 친 이재오계 일각에서는 “오히려 그런 뿌리 깊은 적대감이 양측의 연대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며 박 전 대표와의 연대를 주장하고 있다. 친이계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지금과 같이 이재오 포위정국이 계속될 때 이 장관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오히려 박 전 대표와의 연대 등 파격적인 카드를 내놓아야 돌파구가 생긴다. 죽으러 들어가야 살아 돌아올 수 있다. 경선 패배 이후 권력구도가 급변한 이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계속 방어적인 대응을 할 경우 자칫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식의 돌파정치를 하는 이 장관이 특단의 대책을 내놓아 정국 주도권을 되찾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소장파를 ‘습관성 쇄신론자’로 몰아 박 전 대표와의 당권 연대를 끊어내는 게 첫 번째 미션이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점 때문에 최근 들어 친 이재오계에서는 “이 장관이 당 복귀전에 이벤트를 만들어 박 전 대표를 당의 대권주자로 인정하고 대선 승리를 위해 열심히 뛰겠다고 선언하며 계파 해체를 선언할 경우 당내 혼란수습과 계파정치 타파라는 명분을 쥐며 당권도전에 나설 수도 있지 않겠느냐”라는 극단적인 대책도 나오고 있다. ‘정치에 영원한 적은 없다’는 격언만큼 요즘 이재오 장관에게 절실한 문구가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