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은 대체로 단조롭고 재미없다. 회사 이름이나 로고가 박힌 흰색의 네모난 모양에 이름과 연락처 등이 적혀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진이 붙어있는 명함은 가끔 재미를 선사한다. 경영 컨설팅 업체에 근무하는 L 씨(여·34)도 지난해 퇴직한 상사의 명함을 받고 깜짝 놀랐다. 개인 컨설팅 사업을 시작한 상사의 명함은 일단 앞면이 사진으로 채워져 있었다. 보통 작은 사이즈로 한쪽에 배치하는 것과 달리 중앙에 크게 박혀있었다.
“사진뿐 아니라 명함의 색도 황당했어요. 상사분이랑 헤어지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살짝 붉은 것도 아니고 명함이 온통 새빨갛더라고요. 빨간 바탕에 큰 증명사진이 가운데 붙어있고, 뒷면에는 각종 경력과 서비스 사항이 적혀있었죠. 회사 동료들이 다들 보더니 무슨 점술가 명함이나 유흥업소 홍보물 같다고 한마디씩 하더라고요. 이제 사업 시작하는 분이라서 명함도 중요할 텐데 주변의 반응을 알려드려야 하나 고민이에요. 나름 눈에 띄는 명함을 만드시려고 한 것 같은데 지금까지 본 명함 중에 가장 이상한 명함이었어요.”
명함이 직장인들의 얼굴이라고 하는 것은 빈말이 아니다. 어느 자리에서건 가장 빠르고 직접적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수단이 바로 명함이기 때문이다. 이런 명함 때문에 낭패를 겪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출판업종의 J 씨(30)는 요즘 외근을 나가기 전에 항상 명함 지갑이 두둑한지 확인을 하고 사무실을 나선다. 명함지갑을 체크하지 않았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영업직이라 항상 명함지갑이 벌어지도록 명함을 가득 넣어요. 한 번에 많이 넣고 다니다보니 명함이 줄어든다는 인식을 잘 못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출판 관련 협회의 중요한 임원을 만나게 됐어요. 개인적으로는 물론 회사 차원에서도 비중 있는 자리라 자료 준비도 단단히 하고 긴장한 채 나갔죠. 인사하는 자리에서 명함을 건네는데 명함지갑에 명함이 한 장도 없는 겁니다. 아차, 싶었죠. 서둘러서 노트북 가방 바깥 주머니를 뒤졌는데 다행히 한 장 있더군요. 하지만 상당히 구겨져 있었습니다. 명함을 안 드릴 수도 없고 구겨진 명함을 펴서 드리는데 정말 민망했습니다. 받는 분이 제 얼굴과 명함을 번갈아가며 보는데 식은땀이 나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나가기 전에 항상 명함부터 체크합니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M 씨(29)도 명함 때문에 아까운 기회를 놓쳤다고 털어놓았다. 출근길에 자주 보는 여성이 있었는데 항상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하고 말 한마디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그 여자 분을 불러 세우고 명함을 건네준 것이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는데, 그 이후가 문제였어요. 며칠 동안 모르는 번호로 전화만 오면 혹시 그녀가 아닐까 하고 기대하며 받고 그랬는데 1주일이 훌쩍 넘도록 연락이 없더군요. 간혹 출근길에 봐도 제 쪽은 쳐다보지 않아서 실패했구나 싶었죠. 그러다 어느 날은 거래처 직원이 이상한 일이 있었다면서 얘기하는데 어떤 여자가 자기한테 전화해서 출근길에 명함을 주지 않았느냐고 물었다네요. 날짜를 헤아려 보니까 제가 그 여자 분한테 명함을 주고 2~3일 안이었어요. 명함 준 전날 제가 거래처 직원을 만났는데 그때 받은 명함을 제 명함지갑에다 넣고선 떨린 나머지 확인도 안하고 남의 명함을 그녀한테 준 겁니다. 전화가 온 걸 보면 제가 싫지 않았다는 건데 기회를 놓쳐버린 거죠.”
외식업체에서 일하는 H 씨(33)도 명함 때문에 항의전화를 받았던 경험이 있다. M 씨처럼 명함을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아서 생긴 실수다. 남의 명함을 잘못 건넨 건 아니지만 뒷수습이 더 힘들었단다.
“전에 일했던 회사에서 벌어진 일인데요. 명함 남으면 뭐하나 싶어 틈나는 대로 많이 돌렸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회사로 저를 찾는 전화가 왔어요. 받자마자 상대방이 화를 내시더군요. 도대체 연락이 되질 않는다면서요. 휴대폰 번호가 바뀌었으면 알려줘야지 골탕 먹이는 거냐고 하기에 번호가 바뀐 적이 없다고 하고 확인을 해봤어요. 알고 보니 휴대폰 번호 앞자리와 뒷자리가 바뀌어 인쇄되어 있는 겁니다. 제가 미처 체크를 못한 거죠. 제 주변 사람들이나 가족들은 이미 제 번호를 아니까 번호가 잘못된 명함을 줬어도 알아채지 못했고 저 역시 몰랐어요. 그분 아니었으면 계속 잘못된 명함을 돌렸겠죠. 명함 돌렸던 분들 리스트를 겨우 작성해서 다시 만나고 연락드리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대기업 계열사에 다니는 S 씨(31)는 요새 이직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직 전에는 고민도 많았다. 중견기업에서 대기업 계열사로 스카우트 제의가 왔지만 따져보면 연봉에서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기업이라는 타이틀이 뭐 중요할까 싶어 망설이다가 이직을 결심했고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누구를 만나서 명함을 주면 어떤 회사인지부터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떤 회사고 무슨 일을 하는지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죠. 지금은 명함을 건네면 좋은 회사 다녀서 좋겠다는 반응이 먼저 나옵니다. 사실 급여나 직급 같은 건 거의 변한 게 없는데도 말이죠. 친구들도 부러워하고 가족들도 좋아하네요. 명함 뭐 중요하나 싶었는데 회사 옮기고 나니까 명함에 왜 다들 집착하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아요.”
최근 한 취업·인사포털이 직장인 37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절반 이상이 ‘명함이 본인이나 회사의 이미지에 영향을 준다’고 답했다. 80% 이상은 ‘업무에 명함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일대일의 만남이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이든 직장인들에게 있어 명함은 일종의 ‘자존심’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명함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대목. 회사에서 명함을 제작할 때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