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 특사로 유럽을 순방 중인 박근혜 전 대표. 박 전 대표는 4월 28일부터 시작된 특사 활동 기간에 공식일정에서 단 한 번 같은 치마를 입었을 뿐 모두 다른 옷을 입었다. 박 전 대표의 특사직 수락은 레임덕 위기에 놓인 이명박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연합뉴스 |
박근혜의 부상은 이렇게 찾아왔다. 친박계 내부에서 조기부상에 대한 시기상조론과 필요성이 맞부딪치며 논란이 됐지만 황우여 의원의 원내대표 당선으로 ‘일할 토양이 자연스럽게 마련됐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황 원내대표는 당선 직후 기자회견에서 “박근혜 (전) 대표 등 당의 중요한 지도자들이 일할 토양이 이제는 마련됐다. 계파 의식은 이것으로 깨져서 이런 혁명적 여건이 벌어졌기에 박근혜 대표도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조성됐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가 당장 대표를 맡거나 하는 수직부상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황 대표가 대권주자의 당권-대권 분리 폐지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힌 데다 박 전 대표 측도 조기부상에는 여전히 조심스런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눈엣가시’ 이재오 특임장관이 몰락 조짐을 보이면서 박 전 대표의 당 운영 개입 공간은 훨씬 넓어졌다. 황 대표를 통한 ‘섭정’도 예상되는 대목이다.
이렇듯 ‘황우여 대반란’ 이후 박 전 대표의 정치공간이 넓어지면서 그의 대권전략도 점차 구체적인 플랜을 띠어가고 있다. 사실 친박 진영의 대권전략 핵심은 ‘이명박’이라는 정치의 최대 상수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집권에 결정적 몽니를 부릴 수도 있는 가장 강력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이번 황우여 반란으로 대권가도의 최대 정적인 이재오 장관 세력은 몰락 직전으로 내몰렸다. 마음만 먹으면 당권도 손에 쥘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당내 대권지형을 박근혜를 중심으로 ‘정리’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적 변수 하나를 정리한 셈이다.
이에 더해 강력한 외부 변수 하나가 있다. 바로 내년 총선-대선에서 ‘이명박’이라는 변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다. 재보선 참패 이후 ‘무조건 이명박 탓이야’ 현상이 심화될 조짐을 보이면서 이명박 변수를 어떻게 끌고 가느냐에 따라 한배를 탄 박 전 대표의 득표력도 요동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친박 진영의 한 핵심 전략 관계자는 “앞으로 박 전 대표의 집권전략은 ‘이명박과 함께’로 정리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재오 장관의 몰락은 당내 권력구도를 ‘친 박근혜’로 정리하는 데 이상적이었지만, 이명박 대통령까지 ‘몰락’하는 것을 방관할 경우 집권에 상당한 걸림돌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6년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친박 진영의 핵심 전략 관계자로 활약해 온 A 씨는 “이 대통령의 급속한 레임덕은 한나라당뿐 아니라 보수층 전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불러일으켜 (박근혜 전 대표의) 집권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고 (이 대통령과) 적절한 협력관계를 당분간 유지한다는 내부 방침을 정했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박 전 대표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이 대통령의 급격한 레임덕이 ‘반 한나라당’ 정서로 이어지는 것이다. 정권말기로 갈수록 레임덕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현 정권과 적절한 협력관계를 유지해 벼랑 끝까지 내몰리는 최악의 레임덕만은 피하자는 방침을 정했다. 사실 이런 기류는 지난해 8월 청와대 비밀회동 이후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박 전 대표 측의 집권전략은 ‘대통령 형님’ 이상득 의원과의 교감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박 전 대표가 이상득 라인을 통해 이 대통령의 의중을 다시 한 번 전달받았다는 얘기도 있다. 앞서의 친박 관계자는 “박 전 대표는 청와대로부터 차기 대선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고 개입할 수도 없다는 의사를 전달받았다고 하며, 최근 측근 의원들에게 이 대통령과 현 정권에 대한 발언을 신중하게 할 것을 지시했던 것으로 안다”라고 밝히면서 “동남권 신공항 건설 논란, LH공사 이전 문제 등에 이어 재보선 참패로 MB의 국정운영 지지율이 30% 이하까지 떨어졌는데, 내년 대선까지 이러한 분위기가 이어질 경우 반 한나라당 정서가 확산되어 대선에서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박 전 대표가 유럽 특사직을 수락한 것도 이 대통령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라고 밝혔다.
이렇듯 양측이 활발한 물밑 교감을 하다가 외부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이상득-박근혜’의 강남 모 호텔 회동설이다. 이 회동설은 양측의 강력한 부인으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한나라당 내에서는 대체로 두 사람의 비밀회동을 ‘진짜’로 믿는 분위기다. 친이계의 한 핵심 의원은 이에 대해 “경찰 정보망이 확인했다는 얘기도 있고… 만난 게 맞다고 봐야 한다. 이 의원이 지방의 J 의원을 대동해 ‘알리바이’를 만든 것 같다. 다음날 아침까지도 경찰 정보라인에서 ‘100% 확신한다’는 얘기를 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런데 당 주변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이날 만남에서 양측이 ‘빅딜’을 논의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앞서의 친이계 의원은 이에 대해 “최근 들어 이상득 의원이 ‘(자신의 안전한 하산을 전제로) 박근혜 전 대표의 대선 후보 조기 가시화가 필요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주변에 자주 하고 다닌다는 말이 의원들 사이에서 나오더라”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를 토대로 소장파의 한 핵심 전략 관계자는 빅딜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그날 만남에서 이 의원이 박 전 대표에게 ‘대선후보 조기 가시화를 위한 분위기를 만들어 줄 테니 당권은 우리 쪽 후보를 용인해 달라’는 일종의 빅딜을 제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권뿐 아니라 이 의원의 19대 총선 출마 등 안정적인 권력이양을 보장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최근 양측의 연대 흐름이 급물살을 타고 있고, 재보선 패배로 조기전당대회 개최 요구도 거세질 경우를 대비해 조정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컸기 때문에 시기상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특히 최근 ‘황우여 반란’ 사건은 이상득계가 이재오계를 내침으로써 빚어낸 친박계와의 연대 첫 작품”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 진영은 또한 차기 총선-대선을 반 이명박 정서 대신 ‘박근혜만의 정책’으로 승부를 볼 것이라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 정책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친박 측의 또 다른 핵심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의 복지기조는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을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것을 만들기는 정권 연속성상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박 전 대표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판보다는 자신만의 정책을 내세워 야권과 경쟁한다는 큰 틀의 기조를 세웠다. 특히 빈부, 도시-농어촌 간 소득격차를 줄일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양극화 심화에 따른 대책마련과 그에 따른 복지정책 개발이 박 전 대표의 핵심 정책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지금 시중에는 “이명박은 안 해 본 게 없고, 박근혜는 해 본 게 없고, 북한은 못하는 게 없고, 국민은 모르는 게 없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아다닌다. 북한의 농협해킹 의혹을 두고 나온 말이지만, 박 전 대표에 대한 비유도 그렇게 틀린 것이 아니라는 반응도 많다. 박 전 대표는 과연 ‘해본 게 많은’ 정치인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그의 비밀 집권전략이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