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동안 MBC에 몸담았던 여운혁 PD가 종합편성채널(종편) jTBC로 옮겼다. ‘무릎팍도사’가 속한 MBC <황금어장>과 <무한도전> CP 등을 지낸 여 PD의 행보에 방송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사실 관계자들은 시끌시끌했지만 대중은 갸우뚱했다. PD들의 이동에 감춰진 속내를 읽지 못했기 때문. 여운혁 PD는 강호동 유재석 등 MC계의 쌍두마차를 움직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이쯤 되면 이해가 쉬워진다. 종편이 거액을 들여 스타 PD를 영입하는 데는 그들의 연출력을 넘어 그들의 ‘마당발’에 신뢰를 보내기 때문이다.
여운혁 PD가 만든 <강호동의 천생연분>은 강호동이 메인 MC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프로그램이다. 여기에 <황금어장>이 더해지며 여운혁 PD는 강호동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PD로 자리매김했다. 게다가 여운혁 PD는 섭외력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무릎팍도사’가 자리잡는 데는 그의 놀라운 캐스팅 실력이 뒷받침됐다. 고(故) 최진실을 ‘무릎팍도사’ 테이블 앞에 앉히기 위해 강호동을 비롯해 최진실과 절친한 연예부 기자의 도움까지 요청하며 삼고초려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를 곁에서 지켜 본 강호동 역시 여운혁 PD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낸다. 그는 사석에서 강호동을 ‘호동아’라고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PD다.
유재석 역시 메인 MC로 발돋움할 시점인 MBC <목표달성 토요일>의 ‘동거동락’에 출연할 때 당시 연출부에 있던 여운혁 PD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무한도전>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메인 MC와 담당 CP로 다시 만났다. 때문에 여러 종편에서 여운혁 PD를 영입대상 1순위로 꼽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 종편 관계자는 “수많은 종편, 지상파 프로그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시행착오를 줄여야 한다. 때문에 실패율을 최소화하고 대표 예능을 만들기 위해 유재석 강호동 중 한 명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 두 MC를 움직일 수 있는 PD들이 우선 협상 대상자였다”고 귀띔했다.
종편 채널은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킬러 콘텐츠 찾기에 혈안이 돼 있다. 지상파 후발 주자였던 SBS가 드라마 <모래시계>를 통해 지상파로서 인정받고 제몫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예능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드라마보다 오히려 예능을 킬러 콘텐츠로 삼으려는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예능은 드라마에 비해 생명력이 길기 때문이다. 현재 <무한도전>과 KBS 2TV <해피선데이-1박2일>은 각각 6년, 4년째 방송되고 있다. 유재석이 진행하는 MBC <놀러와>, KBS 2TV <해피투게더>, 강호동을 앞세운 <황금어장> <놀라운 대회 스타킹> 등도 5년 안팎 동안 정상을 지킨 ‘장수 예능’이다.
일반적인 미니시리즈가 석 달 동안 방송되고 일일 드라마도 반년에 그치는 것을 감안하면 예능 프로그램의 생명력은 드라마를 압도한다. 이 관계자는 “스타들을 대거 기용해도 시청률 5%에 그치는 드라마가 부지기수다. 드라마의 성공률이 극도로 낮다는 것이다. <모래시계>가 방송되던 시절에는 드라마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방송 환경 속에서는 드라마로만 승부를 걸 수 없다. 때문에 ‘흥행 보증수표’인 유재석과 강호동을 섭외하는 것이 훨씬 효과가 크다고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스케줄이다. 매주 4~5개의 프로그램에 출연해 거의 매일 방송 녹화를 소화하고 있는 이들이 종편 프로그램에 출연하려면 기존 지상파 프로그램 하차가 불가피하다. 종편에 맞선 지상파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유재석 강호동과 친분이 있는 PD의 영입이 두 MC의 섭외를 보장할 것이라는 생각도 성급하다. 여전히 KBS MBC SBS라는 간판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매체 파워를 무시할 수 없다는 의미다.
유재석과 강호동이 이미 유력 케이블 채널로부터 거액의 출연 제안을 받았지만 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실리보다는 명분을 챙긴 셈이다. 이 관계자는 “연간 20억 원가량의 출연료를 받고 있는 그들에게 돈은 그리 아쉽지 않다. 그 보다는 최고의 MC로서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먼저일 것인데 론칭 초기 종편은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거액 개런티로 유재석 강호동을 끌어가긴 어려울 것이다. 친분이 있는 PD 역시 지상파 소속이라는 간판이 없는 상황에서 두 MC에게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지 알 수 없다”며 유보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런 흐름이 유재석 강호동의 몸값만 올려줄 가능성도 크다. 일선 PD의 경우 직원이기 때문에 웃돈을 주고 종편 행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프리랜서인 두 사람을 붙잡기 위해서는 충분히 베팅이 가능하다. 이런 움직임은 여러 곳에서 포착됐다. <거침없이 하이킥> <지붕뚫고 하이킥> 등으로 시트콤의 명가로 자리 잡은 MBC. <하이킥3>는 막대한 제작비를 받고 종편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하이킥3>는 120부작으로 하반기 MBC에서 방송된다. 외주제작사인 초록뱀미디어가 밝힌 <하이킥3>의 총 제작비는 87억 1000만 원으로 전작 <지붕뚫고 하이킥>보다 3배 가까이 많다. 연출을 맡은 김병욱 PD가 “그렇게 많이 받기로 했나? 몰랐다”고 놀라워했을 정도. <하이킥> 시리즈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MBC가 ‘큰 결심’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여 PD 외에 최근 CJ E&M 중국지사로 이동한 MBC 권익준 부장은 <하이킥> 시리즈를 비롯해 각종 시트콤을 총괄해 왔다. KBS에 사직서를 낸 김시규 전 예능국 PD도 ‘1박2일’이 포함된 <해피선데이>의 산파 역할을 했다. 또한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진 MBC <위대한 탄생>의 임정아 PD도 곧 종편 행을 선언할 예정이다. <god의 육아일기>를 연출한 임 PD는 여운혁 PD와 함께 <황금어장>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결국 모두 유망 콘텐츠와 관련이 있는 PD들인 셈.
한 종편 인사 담당자는 “유재석 강호동을 영입하지 못했지만 이미 성공모델을 만들어 낸 경험이 있는 PD들을 스카우트했다. ‘제2의 유재석 강호동’을 키워낼 역량을 갖췄다는 의미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말이 있지 않나. 장기적으로 채널을 키워갈 수 있는 인재를 영입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안진용 스포츠한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