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선 부회장이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KIA 타이거즈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사진제공=현대차 그룹 |
지난 12년간 현대·기아차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눈에 띄는 경영 실적을 일궈낸 정의선 부회장은 세계가 주목하는 글로벌 리더다. 휘문고-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는 1994년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과장으로 입사한 지 1년 만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샌프란시스코대학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고 일본 이토추상사 뉴욕지사에서 2년간 근무하며 견문을 넓힌 그는 1999년, 현대차 구매본부 구매담당 이사로 본격적인 경영수업에 들어갔다.
국내영업 부본부장(부사장)-기획총괄본부 부본부장 겸 기아차 기획실장(부사장)을 거치며 경험을 쌓은 정 부회장은 기아자동차 사장에 오른 2005년 ‘오너 드라이브’를 본격화했다.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인 피터 슈라이어를 기아차의 디자인총괄 부사장(CDO)으로 영입해 ‘디자인 경영’에 성공한 그는 세계경제포럼(WEF) 차세대 세계지도자로 선정되며 승승장구했다. 2009년 현대차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긴 지금, 그가 현대차의 질적 성장을 위해 내건 키워드는 바로 ‘브랜드 이미지 강화’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자동차’로 가득 차 있다. 그룹 내 지분 구조에 대해선 입을 다물다가도 자동차 관련 질문엔 눈을 반짝일 정도로 남다른 ‘자동차애(愛)’를 자랑한다. 그런 정 부회장의 ‘스포츠애’는 어느 정도일까.
체육계에서 정 부회장은 ‘그림자 리더십’으로 통한다. 다른 기업인 구단주에 비해 그 행보가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체육계 관계자들은 “선수단 운영에 어려움이 생기면 적극 지원에 나서면서도 그 내용이 언론에 노출되는 건 굉장히 꺼린다. 역대 회장단과 다른 독특한 면모”라고 입을 모으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란 생각이 강한 것 같다. 그리고 아직까지 아버지 정몽구 회장이 체육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하다보니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지 않겠느냐”고 귀띔한다.
이러한 정 부회장의 ‘그림자 리더십’ 속엔 스포츠에 대한 깊은 애정이 숨겨져 있었다. 특히 2005년, 제9대 대한양궁협회장으로 취임(아시아양궁협회장 겸임)한 그는 아낌없는 투자로 한국 양궁을 지원하고 있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둔 2008년 7월, 올림픽공원 내에 베이징올림픽 양궁그린필드를 본뜬 모의 경기장을 만들어 실전에 대비토록 했고, 관중석 약 9000개를 확보해 열띤 응원전을 펼치기도 했다. 이듬해 울산에서 제45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를 유치한 정 부회장은 당시 신종플루 비상이 걸리자 선수단 건강을 직접 챙기는 등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양궁협회 관계자는 “젊은 오너다운 세심함으로 선수들을 꼼꼼히 챙긴다. 태릉선수촌에 종종 방문해 훈련 환경을 체크하고, 선수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원이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 여러분은 자기계발을 통해 경기력을 높이는 데 집중하면 된다’고 격려하는 등 격의 없이 지낸다”고 설명하며 정 부회장의 양궁 실력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태릉선수촌에 와서 종종 활을 쏘시곤 하는데, 실력이 대단합니다. 양궁 관계자들 모두 깜짝 놀랐어요. 종종 다른 재벌가 자제들과 모여 활을 쏜다고도 들었습니다.”
정 부회장의 양궁 사랑은 아버지 정몽구 회장으로부터 비롯됐다. 정 회장은 1985년 대한양궁협회장으로 부임한 이후 지금까지 약 200억 원을 투자하며 한국 양궁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계열사인 인천제철과 현대정공에 남녀 양궁팀을 창단함은 물론, 한국형 활과 화살을 개발하고 심박수·시력 측정기를 수입하는 등 양궁에 스포츠 과학을 도입했다. 그러나 협회와 선수단은 무엇보다 정 회장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대표팀을 거친 한 선수의 이야기다.
“지금껏 폴란드에서 선수들이 물갈이 하느라 고생하자 스위스에서 비행기로 물을 공수해준 일만 회자가 됐는데, 그보다 공개 안 된 일화들이 더 많아요. 과거 국제대회에 나간 선수들이 우비 없이 경기에 나가자 본인이 가지고 있던 우비를 벗어 입혀주기도 했고, 해외 전지훈련 때 음식 때문에 고생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국 음식을 직접 챙겨주셨습니다. 비가 많이 올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며 실내연습장을 만들어주기도 했죠. 북한 선수들까지도 챙길 정도였습니다. 생활용품은 물론, 선수들에게 필요한 도구를 한 발 앞서 준비해주십니다.”
정 회장의 대를 잇는 정 부회장의 ‘스포츠애’는 축구와 야구를 아우른다. 특히 구단 및 선수에 대한 지원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신뢰의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프로축구 전북 현대의 사실상 구단주인 그는 구단 경영 상황을 직접 챙기는 열의를 보이고 있다.
전북 현대 관계자는 “2009년 정규리그 통합 우승 선물로 100억 원대 클럽하우스를 약속했고 현재 현대차 건설 계열사인 현대엠코가 시공을 맡아 신축하고 있다. 그동안 시설 교체 예산으로 약 50억 원이 책정됐다가도 시즌 중에 물거품이 되곤 했다. 정의선 부회장이 클럽하우스 신축 약속을 지켜주셨다”고 설명했다.
그는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의 오랜 숙원 사업이던 광주구장 신축을 일궈냈다. 지난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정 부회장은 300억 원에 이르는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KIA 타이거즈 관계자는 “8개 구단 중 최초로 전용구장을 건립하게 됐다. 사기업이 300억 원을 투자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함평에선 150억 원에 이르는 전용연습구장 완공을 앞두고 있다”고 전했다.
고교시절부터 농구 수영 테니스 스키 등 운동에 소질이 많았던 정 부회장이다. 요즘은 주로 등산을 하거나 테니스, 골프를 치면서 여가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테니스 파트너는 사촌동생인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으로 주말에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테니스를 즐긴다고 한다. 막역한 사이로 알려진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은 그의 골프 파트너다. 둘은 종종 필드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를 전하곤 한다.
섬세한 배려와 신뢰의 리더십으로 체육계에 신망을 쌓아 온 정 부회장. 현대차 경영 전면에 나선 그가 또 어떠한 리더십으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게 될 지 궁금하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