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장. |
일요일인 지난 10일 오후 2시 정 사장이 굳은 얼굴로 현대캐피탈 1층 강당에 마련된 기자간담회 장소에 나타났다. 연신 터지는 카메라 셔터와 간담회 장소를 가득 메운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죄송하고 치욕스럽다”며 마른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 사장이 현대캐피탈 해킹 사실을 보고 받은 것은 지난 7일. “고객 정보를 해킹했다”는 해커의 이메일로 여의도 현대캐피탈 본사가 발칵 뒤집힌 바로 그날이다. 노르웨이 출장 중 이 소식을 접한 정 사장은 처음에 사건이 쉽게 풀릴 줄 알았다고 한다. 정 사장은 담담하게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고 다음날 해커들에게 1억 원을 ‘미끼용’으로 입금했다.
하지만 8일 범인 검거에 실패하면서 일이 꼬였다. 정 사장은 오후 8시가 넘어 긴급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귀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 돌아왔지만 사태 수습은 힘들어 보였다. 범인들이 2차 해킹을 시도했고 개인정보를 넘어 금융결제 정보까지 추가로 유출됐다. 사건 발생 36시간이 지났지만 어디로 침투했는지 감도 못 잡았다.
현대카드·현대캐피탈과 늘 비교를 당해온 제2금융권 관계자들은 이번 사건을 놓고 ‘표정관리’를 했다. 회사 직원들도 정 사장이 사내게시판에 ‘사과의 글’을 올린 것에 대해 “너무 일찍 해킹사건을 공개한 것 아니냐”며 정 사장을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재계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둘째사위인 그의 그룹 내 입지가 좁아졌다는 섣부른 관측까지 나왔다.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이 정태영 사장을 ‘벤치마킹’ 사례로 삼은 것(<일요신문> 987호 보도)도 KB금융에게 부끄러운 일이 됐다. KB국민카드의 한 관계자는 “(어 회장이) 현대캐피탈이 아니라 신한은행 등 신한금융지주를 보고 배워야 한다고 더 강조했다”며 말을 돌렸다.
하지만 다음날인 12일 현대캐피탈의 서버 해킹 용의자가 검거되면서 상황이 갑자기 호전되기 시작됐다. 그날 저녁 농협의 전산서버가 마비되는 사고가 터졌고 그 다음날인 13일엔 신라호텔 ‘한복 거부 사건’이 터졌다. 금융업계라면 캐피탈보다는 농협이 영향력이 더 크고, 재벌가에 대한 ‘입방아’라면 아무래도 현대보다 삼성이 더 흥미를 끌게 마련.
여기에 14일 최원병 농협중앙회장의 대국민사과가 정 사장의 그것과 극명하게 비교됐다. 최 회장은 그날 기자들 앞에서 IT담당 임직원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나한테 보고를 제대로 안했다”고 직원 탓을 했다. 최 회장은 “우리가 숨기고 할 이유가 뭐 있나. 자꾸 거짓말하면 일이 커진다니까”라며 고함까지 쳤다. 정 사장이 “임직원들에게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면서 현대캐피탈 여의도 본사는 일주일 만에 분위기가 반전됐다. 정 사장을 비난했던 직원들의 목소리도 쑥 들어갔다. 정 사장의 트위터를 뒤덮었던 “보안관리 똑바로 하라”는 훈계도 사라졌다. 현대카드의 한 관계자는 조심스럽게 “농협 덕분에 우리 이야기가 들어가서 요즘은 좀 숨을 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태영 사장으로선 아직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다. 현대캐피탈 사태는 여전히 진행 중이기 대문이다. 금융당국이 보안상태 집중 점검에 들어갔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과연 그가 다시 업계 ‘멘토’로 올라설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명지 파이낸셜뉴스 기자 mjkim@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