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
각기업마다 특유의 문화가 있듯 회의를 주도하는 상사마다 스타일이 있다. 부하직원들의 입을 열게 하는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홍보회사에 근무하는 K 씨(여·33)는 회의 때마다 입에 자물쇠를 채운다. 회의를 소집하는 부장 때문이다. 입을 열면 열수록 좌절하기 때문이란다.
“올 초 담당 부서장이 바뀌고 처음 회의에서 부장이 했던 말이 ‘앞으로는 계급장 떼고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합시다’였어요. 다들 핑크빛 꿈에 부풀어서 뭔가 달라지겠지 했죠. 그런데 첫날부터 꿈이 깨졌습니다. 답답했던 이전 상사 때문에 그간 꺼내지 못했던 다양한 안건들을 내놨다가 ‘올 킬’(All Kill) 당했거든요. 의견 대립이 생기면 대화보다는 일단 언성부터 높이고요. 사장님 눈 밖에 나지 않는 의견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한 분이라 윗선에서 좀 밀어붙여야 하는 안건들은 아예 입 밖에 내지 않게 됐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계급장 떼자고 하시는데 우리끼리 부장 계급장은 강력본드로 붙였다고 해요.”
유통회사에 근무하는 B 씨(여·28)도 회의시간만 되면 죽을 맛이다. 조마조마해서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하나의 본부가 두 팀으로 나뉘어 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본부회의를 하는데 경쟁관계인 두 팀장 사이가 살벌하기 때문이다. 가시 돋친 말이 오고가는 건 예사.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매번 벌어진다.
“각 팀 부서원들은 서로 팀장들 눈치를 보느라 회의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안 부딪히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하면서 민감하지 않은 주제로만 회의 흐름을 잡으려고 하거든요. 그래도 워낙 불꽃 튀는 사이인지라 툭하면 고성이 오갑니다. 한번은 회사 로고 변경 문제로 회의를 하다가 두 팀장이 멱살잡이를 했던 적도 있어요. 늘 으르렁 대는 두 팀장 때문에 자유롭고 편안한 회의는 꿈도 꿀 수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냥 삼키게 되죠.”
회의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회사도 직원들에겐 고역이다.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H 씨(32)는 회의를 자주 해야 근사한 의견이 나온다고 믿는 분위기가 불만이란다. 나름 회의 문화를 개선해 보겠다고 커피전문점에서도 회의를 하고 시간을 재가면서 회의도 해봤지만 문제는 회의 방식이 아니라 횟수다.
“한번은 어쩐 일인지 아침에 회의 소집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얼씨구나 했는데 점심을 부서가 다 같이 나가서 먹자더군요. 알고 보니 점심 때 회의를 하려고 그랬던 거였어요. 방이 따로 있는 일식집에 가서는 중간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도시락으로 메뉴도 통일시켰더라고요.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죠. 밥 먹으면서 회의 참여도 적극적으로 하라니 무슨 수로 밥도 먹으면서 말도 합니까.”
가구 관련 업체에 근무하는 J 씨(33)는 “그나마 밥이라도 주면서 회의를 하면 다행”이라고 하소연했다. 이제 회의라면 지긋지긋하단다. 이직 전 회사 사장이 회의를 너무 좋아해서 밥도 굶고 회의를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다.
“직원들이 모여서 하는 말이 사장 취미가 회의라고 그랬어요. 주간회의를 하는데 아침 9시부터 점심은 건너뛰고 5시까지 회의를 하는 분이었습니다. 회의가 늦게 끝나서 못한 일을 하느라 야근하기 일쑤였고요. 가족들이 함께하는 어린이날까지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가면 보통 회의는 잠깐 하고 MT 분위기 내는 경우가 많잖아요. 혹시나 했더니 역시였죠. 강화도까지 가서 그날 18시간 동안 회의를 했습니다. 점심 저녁 다 놓치고 다들 삶의 의욕을 잃은 듯 멍하니 앉아 있는데 지치지 않고 칠판에 써가면서 회의를 진행하는 사장을 보면서 체력 좋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회의가 지겨워서 회사를 뛰쳐나왔을 정도니까요.”
회의할 시간만 돌아오면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박동이 빨라진다는 직장인들도 있다. 그만큼 긴장되고 불편한 자리라는 얘기다. 자동차 관련 업체에 다니는 O 씨(30)는 회의시간이 되면 한숨을 크게 한 번 쉬고 들어간다. 할 수만 있다면 귀마개를 끼고 들어가고 싶단다.
“회의만 들어가면 끝내주는 기획 없느냐고 팀장이 늘 닦달을 합니다. 사람이 좋게 말해도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기 힘든데 생각할 틈도 없이 면박을 주니까 미리 준비한 기획도 제대로 내놓을 수가 없어요.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다고 할까요? 팀장 목소리도 높고 날카로워서 솔직히 고함칠 때는 돼지 멱 따는 소리 같습니다. 화를 좀 덜 낼까 싶어서 준비를 열심히 해서 기획 거리를 여러 개 준비해도 욕먹는 건 마찬가지예요. 나중에는 그래서 열심히 준비도 안 하게 되더라고요. 다른 직원들도 회의할 시간만 되면 표정들이 우울해져요.”
의류 디자이너 C 씨(여·27)도 회의가 다가오면 기분이 가라앉고 긴장감이 높아진다고 털어놓았다. 옷을 디자인해서 매니저들 앞에서 품평회를 하는데 그때마다 일할 의욕이 뚝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만든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가차 없어요. ‘이런 것 좀 제발 만들지 마라’, ‘이게 디자인이냐’, ‘지겹다’, ‘작년에 저런 건 하나도 안 팔렸다’ 같은 말랑한 표현부터 시작해서 막말 직전까지 갑니다. 예쁜 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품평회 할 때만 다가오면 밥도 안 넘어가죠. 막상 회의에 들어가서 좋은 말을 듣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래서 회의는 항상 분위기가 안 좋아요. 사람을 늘 무안하게 만들고 마치 인민재판 당하는 것 같거든요.”
한 리서치 전문기관이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0.7%가 회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업무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회의는 꼭 필요한 과정 중 하나지만 지나치게 잦은 회의나 결론 없는 회의는 직원들을 스트레스로 몰아가고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다. 세계적인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끊임없이 회의만 하는 조직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조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옛날 공중전화에 붙어 있던 ‘통화는 용건만 간단히’라는 표어처럼, 직장인들은 이런 표어를 회의실에 붙여놓고 싶지 않을까. ‘회의는 용건만 간단히.’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