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문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금호아시아나 본관(왼쪽)과 1관. 현재 박삼구 회장(왼쪽)은 본관 27층, 박찬구 회장은 본관 22층을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
지난 12일 서울남부지검 검사와 수사관들이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금호아시아나 빌딩 본관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바로 22층으로 향했다. 22층은 박찬구 금호석화 회장의 집무실이 있는 곳. 검찰은 회장 비서실을 포함한 금호석화 직원들을 모두 회의실로 몰아넣은 채 압수수색을 시작했다. 이날 검찰은 21~24층에 있는 금호석화 전 사무실을 포함해 금호석화 협력업체 네 곳에 대한 압수수색도 함께 진행했다.
압수수색이 벌어지던 시각, 박 회장은 서울 용산구의 한 호텔에서 열린 세계합성고무생산자협회 총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전화로 보고를 받은 박 회장도 갑작스러운 압수수색에 크게 당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은 박 회장의 작은처남인 위 아무개 씨(54)가 운영했던 운송업체 제이에스퍼시픽이 금호석화와 위장거래, 과대계상 등의 수법으로 수십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검찰은 이 과정에서 박 회장의 지인들이 운영하는 회사를 비자금 창구로 이용했을 가능성도 살펴보고 있다.
검찰은 이렇게 조성한 비자금이 박 회장의 큰처남(56)이 운영하는 특장차 제조업체인 지노모터스에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사 중이다. 지난 2006년 설립된 이 회사는 2009년 대규모 부동산을 사들이고 중공업 회사를 인수하는 등 회사 규모가 급격하게 커졌다.
금호석화 측은 이런 의혹들을 대부분 부인하고 있다. 금호석화 관계자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빤한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했겠느냐”며 “그런 것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IMF 직후 (금호아시아나) 그룹 내 일부 계열사가 어려워지자 협력업체를 통해 편법으로 60억 원을 지원했던 적은 있었으나 이는 박찬구 회장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라 그룹 차원에서 결정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호석화가 비자금 조성 의혹을 부인하고 있지만 두 처남의 이름이 수사선상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박 회장은 궁지에 몰려 있다. 검찰 내부에서는 지노모터스의 실소유주가 박찬구 회장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다면 검찰이 전격적으로 금호석화 수사에 착수한 계기는 무엇일까. 알려진 바로는 박 회장의 비자금 조성에 깊숙이 개입했던 협력업체 고위 임원이 계열분리 후 계약이 해지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관련 정보를 검찰에 제공했다고 한다. 비자금 조성에 관여했다는 협력업체를 검찰이 정확히 집어서 압수수색할 수 있었던 것도 제보의 신뢰도가 높았기 때문이란 게 검찰 측 설명이다.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사건은 먼저 대검찰청에서 관련 내용을 살펴보고 이를 서울남부지방검찰청으로 넘겼다고 한다.
금호석화에서도 제보자가 앙심을 품고 검찰에 관련 자료를 넘겼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금호석화 관계자는 “오랫동안 거래해왔던 협력업체가 계약이 해지되자 지난 2009년 회사 앞에서 한두 차례 피켓시위를 한 적이 있었다”면서 “만약 검찰에 자료를 넘긴 제보자가 있다면 그 업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과 재계에서는 제보자는 이번 사태의 계기가 됐을 뿐, 실제로는 형 박삼구 금호그룹 회장과 동생 박찬구 금호석화 회장 간 ‘형제의 난’이 검찰 수사로 확대됐다는 쪽에 더욱 무게를 싣고 있다. 재계 서열 10위권이었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지난 2009년 7월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유동성 악화로 워크아웃에 들어간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두 형제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당시 박찬구 회장은 무리한 대우건설 인수로 인해 금호그룹 전체가 흔들리자 ‘형제간 동등한 지분율 보유’ 약속을 깨고 지주회사 격인 금호석화의 지분을 매집했다. 박찬구 회장은 2009년 6월 금호석화 주식 163만 주를 사들였고 형제의 난이 본격화하자 51만여 주를 더 늘리는 등 그 기간 지분율을 4.73%에서 8.43%까지 끌어올렸다.
박삼구 금호그룹 회장 측은 그룹 상황이 좋아지면서 ‘형제의 난’도 마무리됐다고 주장하지만 갈등은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것이 금호가 내부 사정에 밝은 인사들의 설명이다. 신문로 금호아시아나 본관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두 사람은 형제의 난 이후 한 번도 회사 내부에서 마주친 적이 없다고 한다. 현재 박삼구 회장은 27층, 박찬구 회장은 22층을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으나 두 사람이 사용하는 엘리베이터가 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금호그룹 계열사인 아시아나IDT가 금호석화에 ‘직원 빼가기를 했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도 형제 간 갈등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금호그룹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한때 감정이 안 좋았지만 지난해 5월 모친상을 당하면서 관계가 회복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다만 지난해 2월부터 사실상 계열분리가 됐기 때문에 굳이 만날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반면 금호석화 측은 “그것은 저쪽(금호아시아나) 얘기일 뿐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많지만 현재는 말할 단계가 아니다”고 말을 아꼈다.
형제간 갈등을 바라보는 금호그룹과 금호석화의 시선이 엇갈리는 것은 이번 수사에 대한 양측의 입장과 무관하지 않다. 금호석화가 말을 아끼고 있지만 임직원들은 이번 검찰 수사가 사실상 박삼구 회장 측에서 분위기를 조성해 시작됐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금호석화 측은 검찰 제보자도 금호그룹 쪽에서 내세운 중간 다리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금호그룹은 언론을 통해 제기되는 이런 의혹에 선을 그엇지만 혹시나 불똥이 튀지 않을까 조심스런 분위기다. 금호그룹 관계자는 “제보자가 누군지 우리는 알 수 없다”며 금호그룹 측의 제보로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는 항간의 의혹을 부인했다. 그는 “채권단의 관리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검찰 수사를 받으면 우리로서도 좋을 게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금호그룹과 금호석화 내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제보 과정에서 의사소통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보자로 알려진 사람이 금호그룹 박 회장과 가까웠던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검찰 내부에서는 제보자 중 한 사람이 계열분리 전 금호그룹 박삼구 회장 일가와 금전거래까지 할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얘기까지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금호그룹은 그간 박찬구 회장의 원칙 파기로 형제의 난이 벌어졌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금호석화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금호그룹에서 먼저 형제간 갈등이 해소됐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일각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다. 금호그룹 관계자는 “언론이 자꾸 형제간 갈등으로 보도하는 것이 우리로서도 부담스럽다”며 우려감을 나타냈다.
검찰이나 다른 정보기관 관계자들도 검찰 제보와는 별개로 금호석화 관련 의혹들이 한 달 전부터 정보업무 담당자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던 점에 주목하고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내사 중인 사건은 철저한 보안 속에 이뤄지는데 이번 사건의 경우 한 달 전부터 정보기관 관계자들이나 기업 정보팀 관계자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특히 압수수색한 업체들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거론된 것을 보면 (검찰) 내부에서 언론플레이를 먼저 한 것이거나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흘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아무리 협력업체 임원이라고 해도 (박찬구 회장) 처남 회사의 부동산이 늘어났다는 것까지 알 수 없었을 텐데, 검찰이 이 부분도 살펴본다는 얘기를 듣고 의구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현재 검찰은 박찬구 회장에 대해 출국금지조치를 한 상태며, 조만간 소환조사를 벌인다는 계획이다. 검찰의 칼날이 계열분리의 날갯짓을 본격화한 박찬구 회장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박삼구 회장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재계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