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중구에 있는 삼성 본관. 삼성은 현재 근무하는 임직원은 물론, 퇴직한 CEO에 대해서도 ‘철저한 관리’를 하기로 유명하다. | ||
L씨에 대한 사례는 CEO급 경영자에 대한 기업들의 사후관리도, 현직에 있을 때 못지않게 중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 정기주총 시즌이 끝나가면서 각 기업마다 최고경영자에 대한 물갈이가 이뤄졌다. 문제는 물러난 CEO에 대한 관리.
‘관리의 삼성’으로 불리는 삼성그룹은 퇴직 CEO에 대한 관리에서도 정교한 솜씨로 정평이 나있다. 최근 삼성 그룹의 해외 현지 법인 사장을 지내다 삼성 계열사의 상담역으로 물러난 A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A씨는 최근 삼성이 지은 강남역 사거리 인근의 G빌라 로 이사했다. 이곳은 삼성 계열사의 부회장을 지낸 K씨가 CEO로 재직중일 때 삼성에서 제공해 살던 곳이기도 하다.
A씨는 이건희 회장의 비서실과 삼성의 주요 해외거점인 현지 법인 지사장 등을 지내며 한때 이건희 회장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분류됐던 인물이다. 그는 몇 년 전 해외로 나갔던 삼성 원로경영인의 뒤를 이어 삼성 계열사 사장으로 국내 컴백을 노렸지만 B씨에게 밀려 물을 먹었다. B씨는 홍라희 삼성미술재단 이사장에게 호평을 얻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A씨는 삼성그룹 내에서 메모광, 독서광으로 유명하다. 술 한잔 먹지 않고도 좌중을 즐겁게 하는 재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서실에서 일할 때는 이건희 회장이 출근을 잘 하지 않자, “정시에 출근하셔서 정시에 퇴근하셔야죠”라고 직언을 했다가, 계열사 해외 지사장으로 보직 변경됐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A씨는 외부에서 디지털 가전 부문의 세계적인 흐름을 읽고 있고, 외국어를 한국말보다 잘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회장 측근 중 1명이었기 때문에 그룹 내 많은 기업 비밀을 알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사실상 현역 경영진에서 물러난 그를 통해 삼성에 대한 비난의 소리를 들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재계 비서실장의 대명사였던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소병해 비서실장은 이병철 회장 생전에는 비서실장외의 타이틀은 없었다. 그는 이건희 회장 취임 이후에는 삼성생명 부회장 등 부회장 직급까지 승진이 이루어졌고, 이병철 회장의 사후 10년이 지난 97년에야 상담역으로 현역에서 한발짝 물러난 뒤 2000년까지 계열사 고문으로 일했다. 다른 그룹의 경우 총수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면 몇 년 안가 과거 인맥이 깨끗이 청소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물론 A씨도 현직 CEO는 아니지만 상담역으로 상당한 예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시쳇말로 먹고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삼성의 CEO급에 대한 관리는 2단계로 이뤄진다. 현직에 있을 때는 삼성전자와 같은 주요 계열사의 주식을 증자시 우선 배정하는 등의 방식으로 관리한다. 퇴임 이후에는 임원급들은 성우회, CEO급들은 성대회를 중심으로 관리된다.
서울 논현동 모 빌딩에 있는 ‘삼성 성우회’는 삼성그룹 퇴직 임원들의 모임으로 퇴직 임원뿐만 아니라 전·현직 임원간 정보를 교류하는 만남의 장이다. 회사측 지원을 받는 성우회는 생일을 맞은 회원들에게 카드와 축하 케이크를 전달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통해 삼성과 인연의 끈을 유지하도록 노력한다.
바로 아래층에는 삼성 창업지원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퇴직 임원들의 창업과 재취업 정보를 제공하는 곳으로 임원 개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사무공간도 있다.
▲ 지승림 사장(왼쪽), 김문영씨 | ||
삼성 자동차 출신의 임원들이 만든 ‘127회’도 있었으나 지금은 유명무실하다. 127회로 이름 지은 것은 1994년 12월7일 자동차 기술도입신고서가 수리되었고, 1998년 청와대에서 정재계 간담회 형식으로 재계 빅딜이 합의되면서 삼성이 자동차 사업을 포기한 날도 12월7일이기 때문이다.
계열사 대표이사들의 친목 모임은 ‘성대회’로 성우회와는 따로 구분해서 부른다. CEO급 이상을 지낸 그룹 원로들은 지금도 삼성에 의해 관리된다.
이건희 회장의 대리인이라는 말을 듣는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부회장)은 1년에 한두 번씩은 전직 원로급들을 안양 베네스타 골프장으로 초청하여, 그룹 경영현황에 대해 설명도 하고, 푸짐한 선물도 안긴다. 이들 원로들 중 일부는 경영 현장에서 벗어난 지 10년도 넘은 인물들도 있다.
이들은 그룹에 대해 쓴소리를 지금도 하지 않는다. 전직 CEO들 중에서 삼성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이런 것들(퇴직금, 상담역, 자문역 등 전직에 걸맞은 일정 기간의 급여, 경비, 주택지원 등)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삼성의 전직 임원들에 대한 지원은 간접적인 방식으로도 이루어진다.
삼성 구조조정 본부 기획팀장(부사장)을 지낸 지승림씨는 현재 디지털 방송 솔루션 공급업체인 (주)알티캐스트의 사장이다. 이 회사는 삼성 카드 회장을 지낸 이필곤씨가 한때 회장으로 있었다.
삼성전자 부사장을 지낸 김창헌씨는 알티캐스트의 계열사로 프린터 현상기업체인 알티전자의 공동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양사의 대주주인 김문영씨는 삼성 계열사의 부장 출신으로 김창헌씨와 마찬가지로 대정부 업무를 담당했었다. 김문영씨는 특히 재경부를 상대로 하는 업무에 강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알티캐스트 및 관계사들은 삼성전자 및 계열사에 장비들을 공급해 왔으며, 최근 지상파 DMB 준비 사업자인 K-DMB 컨소시엄에 참여했다. 이 컨소시엄에는 반도체 제조 장비업체들도 다수 참여했고, 삼성그룹에 업무용 차를 공급하는 에스에스모토랜드도 참여했다. 에스에스모토랜드 임직원들은 대부분 삼성화재에서 근무했던 전력들이 있다.
7~8년 전만 하더라도 삼성에 근무했던 전력이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해 삼성 계열사들과 협력업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삼성은 신규 사업 검토시 국내외 동종업계 및 유사업종을 벤치마킹한다. 몇몇 사업 분야는 그룹 내 성공 및 실패 사업들을 벤치마킹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룹의 사업 범위가 커지면서 그룹과 이해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을 배제하다 보니 사업 추진에 효율성이 낮아졌다.
이에 기업 문화를 알고 쉽게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전직 임원들이 경영하는 업체들을 협력업체로 받아들임으로써 효율성을 높였다. 아울러 현직에 있을 때 업무상 대립관계에 있던 인물들을 퇴직 후 포용함으로서 기업 보안을 유지하는 이중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알티캐스트 지승림 사장과 이학수 본부장은 1998년 삼성 그룹 자동차 사업의 지속 여부를 둘러싸고 대립각을 이루었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알티캐스트에는 삼성전자 12%, 삼성벤처투자 13% 등 알트캐스트의 지분 25%를 삼성에서 갖고 있다.
사업은 사업대로, 관리는 관리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학주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