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의 한 장면.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리베이트 쌍벌제 강화 이후 대형 제약회사인 N 사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한 김 아무개 씨. 그가 처음 교육 받은 것은 다름 아닌 ‘접대 노하우’였다. 쌍벌제 강화 이후 ‘조심 매뉴얼’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회사는 서너 차례 의사와 연구실에서 만나고 친분을 쌓은 후 자연스레 사석에서 만날 수 있는 사이까지 발전하는 것을 중요한 성과로 여기고 입사 초기부터 교육시켜왔다.
때문에 그는 의사 연구실에서 즉석 연극을 하기도 하고 ‘안마머신’으로 변신해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자신을 무장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가 됐다. 사석에서 만나게 된 후엔 부담 없는 상품권으로 의사의 반응을 파악하고, 이를 거절할 경우엔 “많이 배웠습니다”란 말로 깔끔하게 돌아서는 대화법도 배웠다.
그런데 올해 4월 초 반갑지 않은 손님이 의사들의 개인 연구실에 ‘동거’하기 시작했다. 서울중앙지검 내 리베이트 전담 수사팀에서 직원을 파견시켜 감시감독에 나선 것이다. 그러자 다른 영업방식이 줄을 잇고 있다. 김 씨의 전언에 따르면 상당수 제약회사들은 대학병원 근처 의사들이 자주 찾는 빵집과 식당에 미리 선불을 지급하는 식으로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김 씨는 “암암리에 리베이트를 제공해야하다 보니 제약회사들끼리 ○○제과는 우리가 접수하겠다, △△식당은 우리에게 맡기라는 등 우스꽝스러운 선불경쟁이 한창이다”이라고 귀띔했다.
리베이트 쌍벌제 도입 이후의 변화에 적응하고 있는 것은 병원 영업을 하고 있는 세일즈맨뿐이 아니다. 약국 영업을 담당하는 영업사원들 역시 새로운 환경에 맞춰 변신 중이다.
D 제약사에서 8년째 약국 영업을 하고 있는 강 아무개 씨. 강 씨가 입사 초년기부터 유지했던 영업 무기는 약사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었다. 그는 영업실적을 높이기 위해 매출 규모에 따라 우선순위를 나눈 후 요일과 시간을 정해 차례대로 방문했다.
그가 하는 일은 잡일을 돕는 것에서부터 저녁식사 대접까지 가능한 모든 정성을 다해 눈도장을 찍는 일이었다. 대학병원 근처에 위치한 약국을 상대할 경우엔 지갑을 여는 일도 빈번했다.
당시 약국 진열대에 놓이는 수많은 품목 중에서도 영업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드링크제, 영양제, 비타민제였다. 이 셋 중에서도 소비자 수요가 빈번한 드링크제는 세일즈맨의 실적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약국 영업의 꽃’이었다.
그러나 요즘 영업 환경은 강 씨가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그때와 같지 않다. 쌍벌제 강화 이후 기존의 방식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모든 관행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드링크제가 대체재로 나서는 ‘이상한 전쟁’이 시작됐다는 것이 강 씨의 설명이다.
과거 그는 약사들에게 리베이트를 챙겨주고 자사 드링크제를 약사의 손이 쉽게 뻗칠 수 있는 곳, 환자들의 시선에 쉽게 노출되는 곳에 먼저 진열하려 애썼다. 그러나 리베이트에 대한 감시·감독이 강화되면서부터 이러한 노력은 두 번째 순위가 됐다. 강 씨는 “드링크제가 (리베이트의) 빈자리를 메우는 수단이 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소비자 수요가 많고 다른 약품과 끼워 팔기가 쉬운 드링크제의 납품단가를 낮춰 약사의 수익을 올려주는 ‘마진장사’를 하는 관행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영업환경의 변화를 토로하는 것은 비단 강 씨만이 아니었다. S 제약에서 5년 동안 영업사원으로 일해 온 이 아무개 씨는 시중에 유통되는 드링크제의 범람 이면에 숨은 교묘한 영업 방식에 대해 꼬집었다. 그는 “광동제약이 최초로 마시는 비타민제인 비타500을 출시한 후 매출 효과를 보자 이후 타 제약사에서 비타○○을 뒤이어 출시했다. 이처럼 후발 주자가 광동제약을 따라잡기 위해 쓴 방식이 관행처럼 굳어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밝힌 정황은 이렇다. 비타500과 비타○○은 맛과 효능이 비슷한 데다 결정적으론 소비자가격까지 동일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약사에게 남는 마진. 비타○○ 제약사는 소비자가격을 그대로 두는 대신 후발주자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원가를 절감해 마진을 높여주는 방식을 활용했다. 약사 입장에선 더 많이 남는 장사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점을 활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유사제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타’라는 제품명이 들어간 드링크제만 해도 2~3년 사이 시중에 23개 이상 늘었다. 리베이트가 한창이던 시절엔 중소 제약업체들이 낄 틈이 없었지만 마진이 관건이 되자 여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원가를 대폭 절감시킨 후 비슷한 맛과 효능의 제품을 개발해 적잖은 약국 진열대의 노른자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며 승승장구하던 박카스의 아성이 다른 유사 제품에 밀리게 된 과정도 이러한 분위기 때문이라는 것이 세일즈맨들의 전언이다. 영업사원들 사이에서 박카스의 경우 시중에 유통되는 드링크제 중 ‘제로 마진’으로 악명(?) 높다. 유사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진열대 전쟁이 벌어질 때도 박카스는 원가절감을 하지 않았던 유일한 드링크제였다. 광고정보센터의 기록에 따르면 박카스는 타 제약회사들이 광고비를 절감할 때 오히려 40% 더 비용을 늘려 이미지 마케팅에 주력했다. 덕분에 약사가 권하지 않아도 소비자들이 직접 제품을 찾을 만큼 브랜드 이미지가 굳어졌다.
결국 마진 경쟁과 브랜드 홍보라는 두 갈래길이 존재하는 셈이지만 후자는 시간과 비용 면에서 쉽게 택할 수 없는 길이다. 또 다른 D 제약에서 영업사원으로 근무했던 조 아무개 씨는 “미디어 광고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마진 장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이 경우 상당한 시간과 투자비용이 든다”면서 “대형 제약회사가 아니고서야 그만한 돈을 쏟아 붓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마진장사가 계속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대목이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