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역전에 산다>의 한 장면. |
학창시절 동창을 회사에서 다시 만나는 경우는 심심찮게 벌어진다. 이 경우 동등한 상황에서 만나면 다행이다. 상하관계가 성립하는 상황이면 난감하다. 누군가는 역전의 환희에 빠지고 누군가는 속이 쓰리다. 식품회사에 근무하는 L 씨(여·29)는 가끔씩 이 묘한 인연을 생각하면 놀랍다가도 괜히 기분이 좋다. 현재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아는 사람이 눈에 보였다. 고등학교 동창으로 3년 내내 악명 높았던 인물을 회사에서 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총무팀 경리로 일하는 직원이 낯이 익었어요. 거친 성격에 ‘일진’으로 유명했던 친구였죠. 저도 몇 번 당한 적이 있고, 학교 다닐 땐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돌아가곤 했거든요. 저는 대학 졸업 후 다른 회사에서 경력을 쌓다가 지금 회사로 이직해 대리로 입사했고, 그 친구는 고졸로 사원직급이더군요. 월급이 월등히 많은 건 물론이고, 회사에서는 제가 엄연히 상사예요. 여러모로 그 친구의 일진 시절은 그저 추억에 불과한 거죠. 부서가 달라서 업무상 부딪힐 일은 거의 없지만 회사에서도 동창이라고 살갑게 굴거나 하지 않아요. 철저하게 상사 마인드로 대합니다. 그 친구는 배알이 꼬이겠지만요.”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M 씨(30)가 바로 그 배알이 꼬이는 경우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입사 초기에는 회사에 출근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신입으로 힘겹게 들어간 회사에서 고교 동창을 만났다. 그것도 직속 사수다.
“고등학교 때 저보다 성적도 밑이었고, 일종의 아웃사이더였던 친구가 사수로 있어서 정말 놀랐죠. 사실 친구들 사이에서 ‘꼬붕’ 같은 존재였거든요. 제가 대학 때 학점관리에 실패해서 취업이 늦은 편이라 그 친구는 벌써 대리를 달았어요. 얼굴 볼 때마다 괴롭힌 생각만 나서 죽겠습니다. 뭘 꼬투리 잡힐까 싶어서 일할 때도 조심스럽고요. 그 친구도 동창처럼 대해 주진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딱히 힘들게 하지도 않아요. 근데 그게 더 불안합니다.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고 할까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그 친구 앞에만 서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어요.”
마케팅 관련 회사에 근무하는 O 씨(여·30)는 요즘 회사에 갈 때마다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이전 회사를 그만둔 계기가 됐던 인물을 현재 회사에서 다시 만나게 됐기 때문이다. 이전 회사에서 조용히 나온 것도 아니고 사무실이 들썩일 정도로 한바탕 크게 싸우고 나온 두 인물이 다시 같은 회사에서 만났으니 ‘안 봐도 비디오’다.
“저와 싸웠던 그분은 다른 일을 제치고 본인 일부터 해결해 달라고 요구를 했어요. 물론 저는 안 된다고 했고요. 그 일을 계기로 사사건건 부딪혔고, 마지막에는 각자 능력에 대해 비하하는 발언을 넘어서서 육두문자를 주고받으면서 싸웠어요. 사무실에 다른 직원들이 있었지만 머리채 잡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심각했었죠. 전 그 다음날부터 사직서 내고 나왔고요. 이직하고 잊고 살자 했는데 그 분을 같은 회사에서 다시 만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현재 회사에서 사정 모르는 다른 직원들은 둘이 왜 그러느냐고 물어요. 같은 회사에서 근무했던 건 알고 있거든요. 꿈에 볼까 무서운 사람을 이렇게 매일 보고 있네요.”
길에서라도 마주칠까 두려운 악연을 회사에서 만나는 것만큼 괴로운 건 없다. 얼굴 맞대기 어려운 사람을 하루 종일 보는 건 고역이다. 이런 껄끄러운 인연이 계속 이어져 심각하게 이직을 고려하기도 한다. 대기업 계열사에서 일하는 J 씨(여·31)는 업종을 바꿔 이직을 했고, 그 회사에서 다시 만날 일 없을 것 같았던 사람을 다시 만났다. 문제는 창피해서 얼굴을 볼 수도 없는 기억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미디어 계통에서 일할 때 출입처 홍보팀에서 일하던 분이 이번에 이직한 회사 상사로 있는 거예요. 정말 놀랐습니다. 큰 실수를 하고 다시는 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이거든요. 그분이 출입처 홍보팀 직원으로 일할 때 접대자리를 마련했어요. 당시 동료들과 그 자리에 참석했죠. 1차 후 조용히 집에 갔어야 했는데 2차에서 술을 많이 마시고 그분 앞에서 실수를 했어요. 평소 호감이 있던 터라 술김에 따로 한잔 더 하자고 떼를 쓴 거죠. 그 분이 마련한 접대 자리라 빠질 수 없는데도 저는 왜 마음을 몰라주느냐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죠.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모르게 왔고 그 뒤로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후 일반 기업으로 이직했고 다시 볼 일이 절대 없을 줄 알았는데 매일 출근해서 그분을 볼 때마다 괴롭네요. 힘겹게 이직했지만 그만둘까 생각도 합니다.”
이처럼 현재의 ‘갑을관계’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이를 망각하고 갑의 권력을 마구 휘두르면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길 수 있다. 반대로 현재의 을은 조용히 참으면서 복수를 꿈꾸는 것도 좋을 법하다. 금융권의 S 씨(31)는 얼마 전 들어온 신입을 어떻게 괴롭혀 줄까 즐거운 고민을 한단다. 군대 선임이 바로 아래 후배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군대 시절 나이도 어린데 선임이라고 얼마나 괴롭혔는지 몰라요. 진짜 군대만 아니면 신나게 패주고 싶을 정도로 못되게 굴었거든요. 제대하고 잊고 살았는데 하늘은 제 편인지 바로 아래 후임으로 입사를 했네요. 저한테 한 만행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후배는 저를 반가워하더라고요. 제가 얼마나 이를 갈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예요. 신입 교육을 철저하게 시킬 생각입니다. 사실 군대 선임이 일단 직장 후배로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통쾌합니다. 이제 철들어서 만났으니 그 시절처럼 어이없게 괴롭힐 생각은 없지만 마냥 편안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놔두진 못할 것 같네요.”
통쾌한 마음은 H 씨(32)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계열 회사에 근무하는 그는 이직하고 뜻밖의 인연을 다시 만났다. 첫 직장에서의 상사다.
“그리 크지 않은 회사였고 그 상사는 괴로운 직장생활의 주범이었어요. 할 일도 없는데 야근은 밥 먹듯 시키고 본인 일은 물론 각종 잡일은 다 제 몫이었죠. 결국 그만두고 더 공부해서 대기업으로 옮겼습니다. 현재 직장에서 4년차고요. 그런데 얼마 전 거래처 미팅을 하는데 그 상사가 나왔더군요. 그 상사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어요. 이렇게 갑과 을이 바뀌어 만나는 순간을 상상해 본 건 아닌데 막상 겪으니까 굉장히 통쾌하더라고요. 자꾸 그 상사한테 술 한잔하자고 연락 오는데 따로 만날 일은 아마도 없겠죠.”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