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임 7년 만에 ‘만년 꼴찌’였던 현대카드를 업계 2위로 성장시킨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 업계에선 정 사장의 탁월한 사고와 패션 감각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은 지난 2003년 취임한 뒤 7년 만에 금융지주사들 사이에 ‘왕따이자 만년 꼴찌’였던 현대카드를 업계 2위로 끌어 올리면서 일약 스타가 됐다. 현대카드가 현대차그룹을 등에 업고 쉽게 장사하는, 그저 그런 카드사에서 단숨에 모범 사례로 떠오른 셈이다. 현대카드와 신용카드업계 2위 자리를 두고 치열한 접전을 벌일 KB국민카드와 삼성카드에게 정 사장은 벤치마킹의 대상이 됐다.
특히 KB금융지주의 현대카드 사랑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이 KB국민카드의 분사를 앞두고 정태영 사장을 만나기 위해 여의도 현대카드·캐피탈 본사를 수십 차례 방문한 것은 업계에선 공공연한 비밀이다.
어 회장은 취임 직후 가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벤치마킹 대상으로 현대카드를 첫손에 꼽았다. 그는 “KB국민카드보다 점유율은 낮지만 현대카드 같은 곳을 국민카드가 배웠으면 한다. 현대카드는 세부적인 부분까지 매우 치밀하게 잘 하는 거 같다”면서 “정태영 사장의 사고가 굉장히 앞서간다”고 찬사를 보냈다.
국민은행이 젊은 층을 확보하기 위해 선보인 대학생 전용 카페형 은행점포 ‘락스타’도 정 사장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어 회장은 심지어 KB국민카드의 사장으로 취임한 최기의 사장에게 ‘정태영 사장을 닮으라’고 직접 주문했다는 후문이다. 덕분에 최 사장도 분사 직후인 3월 한 달 동안 여러 차례 정 사장을 만나기 위해 여의도를 찾았다.
이 때문인지 최 사장은 취임식 이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정태영 사장과 흡사하게 바뀐 패션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지난 3월 2일 취임식 때 최 사장의 패션이 ‘2 대 8 가르마’에 회색 정장, 흰색 와이셔츠의 은행원 스타일이었다면 23일 간담회에서는 체크무늬 정장에 패치워크 작업을 한 하늘색 와이셔츠를 코디한 ‘댄디남’이 돼 있었다.
삼성카드의 ‘정태영 벤치마킹’은 KB국민카드에 뒤지지 않는다. 지난 연말 삼성그룹이 삼성카드의 수장을 유석렬 사장(현 삼성토탈 사장)에서 GE그룹 부사장 출신의 최치훈 사장으로 전격 교체한 것도 ‘정태영 효과’라는 분석이다. 최 사장과 정 사장은 GE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한 사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제조업체 사장을 카드사로 전격 발탁한 것 자체가 정 사장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
실제 두 사람은 평소에도 자주 만나서 업계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카드가 마케팅 대전이 펼쳐지는 4∼5월을 앞두고 보스턴컨설팅그룹(BCG)로부터 ‘시장점유율 확대를 위한 전략 컨설팅’을 받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런데 정작 삼성카드와 KB국민카드 직원들은 이 같은 수뇌부의 ‘정태영 사랑’이 달갑지만은 않다. 각사 사장들이 정태영 사장을 만나고 돌아오기만 하면 직원들에 대한 요구가 자꾸 늘어나는 것이 그 이유. 예전에 자신보다 못했던 꼴찌를 따라하자니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다. 또한 1960년생 젊은 정태영 사장을 따라잡는 것도 부담스럽다. 삼성카드는 최 사장 취임 이후 염색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최치훈 사장은 직원들에 늘 ‘젊음과 패기’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국민은행의 한 관계자는 “어 회장이 정 사장을 만나고 오기만 하면 새로운 주문들이 생긴다”면서 “임원회의 도중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못 내는 임원을 전격 교체하겠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더욱이 앞으로 삼성-국민-현대 3각 구도의 전업계 카드사 2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정태영이라는 똑같은 ‘멘토’를 둔 만큼 비슷한 곳에서 비슷한 영업 전략으로 경쟁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4월 영업전을 앞두고 VIP전용 카드시장에 삼성카드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VIP카드 시장은 현대카드가 2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틈새이자 경쟁시장’. 퍼플카드 레드카드 블랙카드 등 연회비가 수십 만 원에 달하지만 그 만큼 수익성도 높다.
이 시장에 삼성카드가 도전장을 내민 것. 삼성카드는 3월부터 상위 5% VIP를 대상으로 하는 삼성시그니처카드 상품 전담 상담사를 공격적으로 모집하고 있다. 삼성 시그니처카드의 한 장당 발급수수료는 이용금액수수료를 포함해 최고 17만 원. 상담사 지원 자격도 4년제 대학 졸업자 이상으로 까다롭다. 현대카드의 레드카드와 퍼플카드 등 VVIP용 전담 카드 모집인의 발급수수료는 장당 최고 22만 원이다.
단순히 영업 경쟁뿐만 아니라 서비스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KB국민카드는 분사와 동시에 홍대 앞 클럽에서 마포영업점 개점식을 하면서 인기 몰이를 했다. 이에 뒤질세라 현대카드는 VIP 전용 라운지를 준비 중이다. 이달 말 서울 청담동에 VIP 카드인 퍼플카드 가입자만 입장이 가능한 전용 라운지 ‘퍼플바’(가칭)를 오픈할 예정이다.
업계 관계자는 “카드사가 서울 강남의 최고급 요지에, 그것도 국내 유명 호텔에서 업무위탁을 하는 라운지를 운영하겠다는 발상이 놀랍다”면서도 “비용이 상당할 만큼 과열경쟁을 우려하는 상황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올해 분사를 앞둔 우리은행의 우리카드와 농협의 NH카드까지 가세하면 마케팅 과열 경쟁은 불을 보듯 뻔하다”면서 “기존의 카드사들이 어떤 자세로 시장에서 포지셔닝을 할 것인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김명지 파이낸셜뉴스 기자 mjkim@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