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0월 25일 국회 본회의에서 박근혜 의원과 정두언 최고위원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새 계파 형성의 단초는 정두언 의원 등의 소장파가 최근 ‘친 박근혜’를 외치며 좌표이동을 하는 것에서부터 발견된다. 소장파는 총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박근혜라는 브랜드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며 연일 구애작전을 펴고 있다. 박 전 대표도 그런 프러포즈를 마다하지 않을 전망이다. ‘영남공주’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선 수도권에 포진된 소장파의 지원사격이 필수적이다. 이상득 의원은 이미 박 전 대표와 한 배를 타고 하산을 준비 중이다. 현재 ‘이상득-박근혜-소장파’라는 새로운 계파는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 직·간접적으로 연대할 토대를 마련해가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친 이재오계뿐이다. 정계개편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해온 이재오계는 거대계파에 왕따를 당하든, 아니면 굴욕적으로 편입돼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됐다. 4·27 재·보궐 선거를 전후해 거세지고 있는 한나라당 권력재편의 물밑 회오리를 들여다봤다.
한나라당의 권력구도가 급속도로 재편되고 있다. 최근 들어 이상득 의원과 박근혜 전 대표의 화합 분위기가 조성되더니 급기야 그 훈풍에 ‘만년반박’이었던 소장파마저 합류할 태세다. 이렇게 될 경우 한나라당은 ‘이상득-박근혜-소장파’라는 새로운 거대 계파가 탄생하게 되는 셈이다. 개헌드라이브로 올해 초 또 다시 박근혜 죽이기에 나섰던 친 이재오계만이 외롭게 반박그룹을 지키게 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와해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친 이재오계에서도 조기전당대회와 총선 등을 거치며 ‘월박’하는 의원들이 나타날 경우 한나라당은 급속하게 ‘박근혜당’으로 권력이 재편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런데 여당 일각에서는 “왜 이렇게 갑자기 여당이 박근혜당으로 바뀌게 됐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박 전 대표가 작심하고 권력의 전면에 나선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박근혜당 운운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얘기다. 하지만 각 계파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박 전 대표가 손 안 대고 당을 접수하는 형국으로 가고 있는 셈이다.
먼저 이상득-박근혜 조합은 이미 지난해 8월 21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청와대 비밀회동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상기해보면 간단한 ‘합의’였지만(이명박 정부의 성공과 정권재창출에 합의한 것이다), 이 연대의 틀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동남권 신공항 논란에서 양측의 갈등은 최소화됐고, 유럽 3개국 특사 합의 등으로 양측의 신사협정은 잘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4·27 재·보궐 선거의 분당 을 공천과정에서도 양측은 이심전심으로 이재오계의 정운찬 전 총리 ‘부양’을 저지하며 호흡을 맞췄다. 이명박 정권의 안전한 하산은 이상득 의원이 내년 총선에서 다시 배지를 다는 필요충분조건이란 점에서 양측의 연대 틀은 더욱 공고해질 전망이다.
최근 극적인 ‘친박’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소장파도 박 전 대표와의 연대가 절실하다. 한나라당 소장파의 리더 격인 정두언 최고위원의 최근 변신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정치적 흐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서 2007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죽이기’의 선봉장이었다.
하지만 정치에서 영원한 적은 없다. 최근 그는 박 전 대표의 정치적 실체를 인정하고 그것을 살려나가야 당이 살 수 있다고 연일 주장하고 있다. 지난 13일에는 “제가 만약 대통령이라면 정권 재창출을 위해 차기(대권 주자)를 언제든지 부각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유력 인사가 전면에 나서서 역량을 발휘해야 하고, 정권 차원에서도 이를 적극 뒷받침해야 한다는 게 정 최고위원의 논리다. 누가 봐도 박 전 대표를 치켜세우는 뉘앙스의 발언이다.
정 최고 측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의 한 핵심 측근은 최근 정 최고의 ‘박근혜 구애작전’에 대해 “원론적 이야기다. 어차피 내년 총선은 박 전 대표가 중심이 돼 치러야 한다. 소장파도 일단 총선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렇다면 박 전 대표라는 훌륭한 자산을 잘 활용해야 한다. 당연히 박 전 대표를 중심으로 당의 생존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뜻에서 정 최고의 주장에는 진정성이 있다. 반면 이재오 특임장관의 경우 자기 이해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것 같다. 당을 접수하기 위해 박 전 대표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친이-친박이 또 다시 갈라져선 내년 총선에 답이 없다. 무조건 화합해야 한다. 그 대상이 박 전 대표라 하더라도 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대립갈등 구조를 청산해야 총선에 대한 답이 나온다”라고 말했다.
사실 소장파의 박근혜 구애작전은 이미 지난달 원내대표 경선을 둘러싸고 한 차례 불거져 나온 바 있다. 당내 소장파 모임인 ‘민본21’은 지난 3월 24일 “새 원내대표는 당내 주류(친이계)의 세몰이식으로 선출돼서는 안 된다. 청와대로부터 자유로운 중립 인사가 돼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친이계인 정태근, 친이 중립파인 김성태, 중립파 권영진 의원 등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다. 소장파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당이 환골탈태해야 하고, 박 전 대표가 내년 총선을 주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를 당의 전면에 끌어들이기 위해선 친이계 거수기 대표가 아닌 중립 인사를 원내대표로 내세워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소장파의 이런 변신은 총선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의 결과다. 그래서 “박근혜를 총선 서바이벌의 안전판으로 이용한다”라는 비판도 나온다. 소장파가 박 전 대표의 정치철학에 대해 여전히 부정적인 인식을 하고 있고, 친박계 또한 소장파의 극적인 변신을 ‘1회용 보스로 활용한 뒤 배신할 것’이라며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그럼에도 박 전 대표 또한 소장파의 지원이 필요한 측면이 있다. 이는 여당의 ‘이상득-박근혜-소장파’라는 거대 계파의 성립을 ‘화룡정점’하는 결정적 요소다. 박 전 대표의 선택에 따라 새로운 거대 계파가 형성돼 총선을 거쳐 대선까지 직행하는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박 전 대표에게 있어 소장파와의 연대는 그 자체로 총선-대선의 전력상승 효과를 가져다주는 중요한 포인트다. 박 전 대표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구시대적인 이미지를 벗어던져야 한다. 그 첫 번째 돌파구가 바로 소장파와의 연대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박 전 대표는 ‘영남공주’라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로 정치적 위상이 영남에 편중돼 있다. 수구세력을 대변하는 지도자의 이미지가 강한 것도 대구·경북에 머물러 있는 한계 때문이다. 이는 집권하기 위해선 꼭 해결해야 하는 요소다.
그것을 위해 친박계 소장파들을 중심으로 영남 중진 물갈이론이 계속 나오고 있다. 조기전당대회가 실시된다면 세대교체 흐름을 소장파와 주도해 당내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지지층이 영남에 편중돼 있는 만큼, 수도권에 주로 뿌리를 두고 있는 소장파들을 흡수해 수도권 공략의 교두보를 마련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
현재 박 전 대표는 여당에 만연한 선거 패배 공포감으로 더욱 주가가 치솟고 있다. 청와대가 유럽 3개국 특사 지명을 서둘러 발표한 것은 박근혜 바람을 재보선에 어떻게든 활용하려는 고육지책이다. 원희룡 사무총장도 4·27 재·보궐 선거와 관련, “박 전 대표의 지지자들도 정부에 대한 거리감을 두고 있었지만 2012년 대선 주자들의 운명과 직결된 만큼 적극적인 결집이 있을 것”이라며 친박 바람을 기대하고 나섰다.
한나라당의 한 소장파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어떤 식으로든 내년 총선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총선을 넘지 못하면 대선도 없다. 그리고 이 중요한 과정에서 그는 새로운 계파를 만들어내려고 할 것이다. 대구·경북 중진들과 부산의 일부 친박 의원들이 낙천할 가능성이 많다. 분위기 쇄신과 새로운 집권 세력을 만들기 위해 박 전 대표로서도 어느 정도 출혈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박 전 대표를 필요로 하는 외부적 요인은 여당을 더욱 박근혜당으로 몰아가는 데 일조하고 있다. 여기에 친박계가 안고 있는 구시대적 이미지도 소장파와의 연대를 통해 환골탈태할 필요성이 커진다. ‘이상득-박근혜-소장파’의 거대 계파 성립 여부는 4·27 재보선이 첫 번째 관문이 될 전망이다. 분당 을 강재섭 전 대표가 생환해올 경우 친 이재오계의 공천분란 책임론이 불거지게 되고, 거대 계파의 접착력은 더욱 강해질 전망이다.
이렇게 거대 계파가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은 이재오계의 필연적인 몰락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아도 친 이재오계는 모래성 계파가 되기 일보직전이다. 이재오 특임장관이 지난 13일 저녁 친이계 의원들을 소집했으나 나온 의원은 30여 명 정도였다. 이는 지난 1월 개헌 의총 직전에 소집령을 내렸을 때 모인 40여 명보다 줄어든 숫자다. 특히 올해 2월 초 이재오 장관이 주도했던 개헌 의원총회에 130명의 의원이 몰렸던 점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이다.
친 이재오계는 점점 박근혜당으로 가는 현재의 여당 권력구도에 변화를 주기 위해 정계개편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언급하는 계파다. 이상득 의원은 물론 소장파까지 ‘월박’의 흐름을 대세로 인정하고 있지만 그들은 끝까지 거부의 몸짓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여의도의 한 정치 컨설턴트는 “이재오 세력이라고 해봐야 이제 20~30명 남짓이다. 이들은 소장파처럼 박 전 대표와의 연대를 모색하는 것 같은 탄력적인 행보를 하기에는 너무 멀리 가버린 세력이다. 월박을 하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인사가 대부분이라 어떻게 해서든 홀로서기를 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저항은 당이 총선 체제로 급속하게 변화되는 과정에서 점차 약화될 것으로 본다. 이재오 장관이 당으로 오는 것에 대해 소극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미 대세를 읽고 퇴로를 찾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한나라당의 권력구도는 친 이재오계와 이명박-이상득 형제가 양분하고 있던 구도에서 ‘이상득-박근혜-소장파’라는 새로운 거대 계파로 전이되는 과정에 있다. 이런 흐름의 물밑에서 자연스럽게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박근혜 전 대표로의 권력이양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